1983년 10월 9일 한글날. 청천벽력 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버마(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 및 수행원들이 아웅산 묘소에서 강력한 폭발 사건이 발생해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아니야, 그럴 리가….” 사실이었다. 대통령 정무제1비서관을 맡고 있던 친구가 날벼락을 맞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망자 중에는 불행 중 다행으로 친구는 없었다. 후에 그에게 전해들은 사연은 이랬다. “호텔에 남아서 인도와 관련된 자료 좀 챙기시오. 비행기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말이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홍순영 비서관에게 수행하지 말고 호텔에 남아 있으라고 했단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테러 때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사람이 이렇게 먼저 가다니 기가 막혔다. 이번에도 아니기를 빌고 빌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4월 30일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슬픔에 젖어 있을 때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영결식은 지난 5월 3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외교부장(葬)으로 치러졌다.
그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빛날 별이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추모사에서 “고 홍순영 장관은 정직과 원칙을 소신으로 삼아 평생을 굳힘 없이 실천한 진정한 외교관”이라며 “협상의 현장에서는 누구도 내기 어려운 용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며 국익을 지키는 데 진력하시던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고 밝혔다.
그는 40여년 외교 행정관으로 권력의 속성에 물들지 않았다. 원칙에 벗어난 일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김대중정부 때 외교통상부와 통일부 장관 등을 지낸 홍 전 장관은 대사 시절 한국의 대(對)공산권 수교에 첨병 역할을 했다. 그는 도미노가 하나하나 넘어지듯이 수십년간 잠겨 있던 동구권 국가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 우리 외교사의 새로운 장을 써내려가는 등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2001년 9월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그는 북한의 떼쓰기 행패를 바로 잡으려고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는 상호협상 원칙을 양보하지 않아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는 임명 4개월 만에 경질됐다. 그는 40여년간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다. 2000년 당시 반기문 주오스트리아 대사를 차관으로 발탁해 유엔 사무총장이 될 발판을 마련하게 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 전 장관은 최근 지병이 악화되자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친구의 얼굴도 잘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에게 평생 동안 갚지 못할 신앙의 유산을 남기고 갔다. 세상에 알리지 않고 조용하게 떠난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그의 마지막 흔적을 조금이라도 알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장황하게 얘기했다.
홍 전 장관은 최근 기억력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애국가’ 가사만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찬송가 438장을 자주 불렀다. 오늘은 홍 전 장관이 떠난 지 정확히 두 달이 되는 날이자 호국보훈의 달 마침표를 찍는 날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한국교회를 걱정하며 기도했다. 천국의 문턱에서도 뒤를 돌아보며 남은 자들을 걱정하며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간 친구가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그립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주에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할렐루야 찬양하세/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예수와 동행하니/그 어디나 하늘나라.”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동순 (6) 아웅산 테러서도 살아남았던 믿음의 친구 홍순영
입력 2014-06-30 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