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동전 없어? 아쉽네. 그럼 77년이나 83년도 10원짜리 동전을 찾아줘. 이왕이면 헌 걸로….”
27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회현지하상가의 ‘화폐Bank’ 점포. 연두색 모자를 쓴 노인이 주인 용인영(64)씨와 한창 흥정을 벌이고 있었다. 10원짜리 동전을 놓고 흥정이 벌어지는 이유는 제조연도에 따라 값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70년대 10원짜리는 2000원에 거래되지만 66년 주조된 것은 30만원을 웃돈다. 같은 연도에 만든 지폐라도 접은 자국이 있으면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때문에 ‘돈이 되는 돈’을 골라 수집한 뒤 되파는 ‘화폐 재테크족’도 많다.
노인의 수첩에는 ‘1원 74 3’ 등의 숫자가 암호처럼 빼곡히 적혀 있었다. 1974년 주조된 1원짜리 동전 3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가게에는 노인이 찾는 동전이 1개밖에 없었다. 노인은 조용히 ‘3’ 옆에 ‘1’이라 쓰고 동그라미를 둘렀다. 이 동전은 시가로 만원이 훌쩍 넘지만 용씨는 단골인 노인에게 5000원만 받았다. 그는 “이곳을 자주 찾는 분들이 고맙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40여년 전부터 주화를 모으고 있는 김형준(91) 할아버지는 아직도 이 상가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2003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정정한 모습이다. 그는 “화폐를 모으는 것에 재미를 느껴 즐겁게 살다보니 1년짜리 인생이 지금까지 왔다”며 지팡이를 짚고 웃었다.
1초를 이기는 60초의 매력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명품관 외벽에는 해외 고가 브랜드들이 이번 시즌 출시된 ‘신상’을 대문짝만하게 광고하고 있다. 계절을 앞서가며 패션의 선두를 자처하는 이 백화점 건물 앞 지하에는 시간이 멈춘 조그마한 거리, 회현지하상가가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비싸고, 낡은 것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회현지하상가에는 쉽게 보기 힘든 화폐와 우표, LP판이 가득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젊은 세대를 위한 옷과 화장품을 파는 현대식 상점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지하상가의 민낯이 모습을 드러냈다. 14곳의 화폐와 우표 가게, 9곳의 LP 판매점이 옹기종기 자리한 채 세월을 거스르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평론가 남무성씨는 대표적인 ‘회현 마니아’다. 3년여 전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매주 회현지하상가를 찾아 LP판을 구입했다. 그는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에 대해 “상인들의 장인 정신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씨는 “상점이 많지 않지만 주인들이 음악 전문가 수준”이라며 “주인들과 자연스럽게 음악 이야기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몇 년 새 아날로그 열풍이 불면서 LP판 가격이 덩달아 껑충 뛰었을 때도 이곳 상점들은 가격을 크게 올리지 않은 점도 마음을 끌었다.
소수 마니아를 위한 LP판도 많다. 그는 “우리(전문가)들은 한두 번 가 보면 안다. 희귀 앨범이 많아서 ‘보물찾기’ 하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CBS 정우식 PD도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LP를 거래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곳은 온라인에서 구하기 어려운 앨범도 많이 찾을 수 있는 데다 가격도 싸다”고 말했다.
클래식 LP판을 주로 판매하는 ‘LP하임’은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유명 연주자의 음악보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불가리아 동독 등의 연주자 음반을 주로 취급한다. 처음 찾는 손님들이 유명한 오케스트라 앨범을 찾을라치면 이곳 주인은 “나는 그런 것 없다”며 짐짓 어깃장을 놓는다. 그리곤 같은 음악을 연주한 무명 연주가의 음악을 들어보라고 추천하는데 한번 이렇게 들른 사람은 꼭 다시 찾아 음반 추천을 요청한다고 한다.
LP를 재생하려면 꽤나 품과 시간이 든다. 지름 30㎝ 크기의 LP판을 정성스레 닦은 뒤 턴테이블에 얹고 바늘을 올리면 ‘지이이익-’ 소리와 함께 음악이 재생되는 데 60초 정도가 걸린다. 열이나 습기에 약해 보관도 까다롭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1초 만에 노래를 듣는 간편한 디지털 음원 세상에서도 이 ‘구식’ 장비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팝음악 LP전문점을 운영하는 주인 A씨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뒤 과거의 가치를 소중히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러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날로그 붐’ 타고 사람들 발길 이어질까
78년 지어져 지난해 리모델링을 마친 이 상가에선 지난 13일부터 이틀간 처음으로 ‘아날로그 페스티벌’도 열렸다. 인근 사거리에 횡단보도가 생긴 탓에 지하상가를 거쳐 가는 유동인구가 감소하면서 손님이 크게 줄어들자 상인회와 서울시설관리공단이 마련한 행사다. 첫날에는 ‘회현으로 떠나는 음악여행’이라는 주제 아래 인디뮤지션들의 공연과 중고 물품 할인 등의 행사가 개최됐다. 뮤지션 ‘볼빨간’이 DJ로 나서 편곡된 번안곡과 함께 추억의 원곡을 함께 소개하는 음악 해설을 들려줬고 이튿날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멤버로 활동했던 ‘미미시스터즈’와 ‘우쿨렐레 피크닉’의 무대가 펼쳐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회현지하상가를 찾을 수 있도록 마련된 행사였다.
이곳은 다른 지하상가에 비해 오랜 시간 이곳을 지켜온 이들이 많다. 시설관리공단이 관리하다 보니 월세와 관리비가 일반 상점보다 저렴해 상가문화가 오래 유지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서울시설관리공단 오성규 이사장은 “오랜 시간 이곳을 지킨 상점과 손님들이 회현지하상가에 대한 애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아날로그 붐’을 타고 상가가 활성화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
아련히 멀어져 간 ‘그 시절’을 만나 보세요
입력 2014-06-28 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