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 다따다다… 따다 따다다… 따다따 다다… 따다따다다…."
마구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를 피해 달아난 갈대밭 사이로 얼마나 달렸을까. 콩 볶는 듯하던 기관총 소리가 멈출 즈음 옆에는 함께 탈출한 동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중무장한 중국 병사들이 마을 주민들을 한 명씩 몸수색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를 만주벌판으로 보냈던 나의 뜻을 아는가?" 전광석처럼 빛나는 영혼의 울림이 온 몸에 느껴지자 의지와 상관없이 중국말이 술술 나왔다. 중국 병사는 "중국인이구먼!" 하면서 한복 저고리 안에 끼어 입은 관동군 복장을 보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고(故) 배인수(1924∼2002) 예비역 소령이 아들 배철(47·부천 길과빛교회) 목사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배 소령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켈로부대원으로 참전했다. 배 목사의 모친 김광희(80·부천 성광감리교회) 권사는 백마부대 선전원으로 활동했다. 배 목사는 군 복무 중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세 사람 모두 국가유공자다.
한국전쟁 64주년 기념일인 지난 25일 오후 배 목사와 김 권사는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이들은 일명 ‘오공탑’으로 불리는 ‘1950년도 현지 임관 전사자 추념비’ 앞에서 12년 전 하늘나라로 간 부친과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얘기꽃을 피웠다. 배 목사 부친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배 목사는 임관자 명단이 새겨진 비석 중간쯤에서 부친의 이름을 가리키며 기도하듯 말을 이어갔다.
“전마의 혼탁함 속에서 부친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선물로 주시고, 자녀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그곳에 40년 전 꽂아놓은 묘목들이 자라나 거목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의 역사에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배 목사는 부친이 17세 때 일본 강제징용군으로 끌려간 사연을 들려줬다. 당시는 1000명이 한 땀씩 바느질해 만든 저고리를 입고 입대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는 미신적 관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였다. 독립운동을 펼쳤던 중국 팔로군과의 전투로 명성을 쌓아가던 일본 관동군은 조선인의 목숨을 담보로 미 대륙 침략의 야심찬 속내를 드러냈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일본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았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관동군 소속인 부친은 졸지에 중국포로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김 권사는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남편은 극적인 탈출에 성공해 결국 자유의 몸이 됐다”면서 “8·15 광복의 기쁨을 맞으며 일본 관동군 출신 조선인들을 주축으로 대한민국 군인의 효시인 ‘국방경비대’를 조직해 한국전쟁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배 목사가 부친으로부터 들은 얘기 중 잊을 수 없는 사연은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사망한 사연이다. 부친이 자신의 형과 동생을 잇달아 잃고 한꺼번에 장례를 치른 현장 설명은 한편의 전쟁영화를 보는 듯했다.
“동네 사람들이 두 무리로 나누어 장례식을 치렀답니다. 큰아버지는 인민군의 총에, 작은아버지는 남한 경찰에 의해 희생된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게 협조한 사연을 들은 경찰이 그 자리에서 동생을 살해한 것이지요.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친은 범인을 색출해 동생의 시신을 매장할 때 그 살인자를 밀어 넣었다더군요. 하지만 ‘죽은 사람은 죽었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벌하시니 사람이 벌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음성을 듣고 하늘을 향해 총을 쏜 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어요. 그때 하늘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왔고, 장례 중인 그 자리에만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고 합니다.”
배 목사는 생전에 부친이 들려준 육성 증언을 이렇게 전했다. “하늘도 울고, 동네 사람들도 울고, 나도 울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었음을 다시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배 목사는 중앙대를 졸업하고 학사 장교로 입대해 1994년 겨울 15사단 38연대 연대군수장교로 근무했다. 소대장 시절 크레모아 뇌관 폭발로 215야전병원을 거쳐 춘천, 청평, 수도통합병원까지 후송되면서 수술을 반복해 받았다.
김 권사는 아들의 생명이 시한부 7년이라는 수도통합병원 담당 군의관의 말에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하니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담당 의사는 곧 영안실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더랍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은 은밀하게 아들을 만지셨어요. 당신의 종으로 부르고 계셨던 것이지요. 다른 가족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시름에 젖었지만 나는 아들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습니다.”
결국 김 권사의 굳건한 믿음은 5개의 장기를 수술하고, 3년 동안 목소리를 잃은 불효자를 통해 또 다른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들은 서울신학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협성신학대학원을 거쳐 감리교 목사가 됐다.
배 목사는 현재 ‘길과빛교회’라는 감리교회를 개척해 8년이란 세월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50여명의 상처받은 교회학교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특수 사역을 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시한부 인생인 그에게 먼저 청혼한 사랑하는 동갑내기 아내 설영희 사모가 있다. 영양사인 설 사모는 새소망의 집 등 역곡 일대 소외된 아이들과 이웃들에게 육신의 영양식을 제공하고 있다.
길과빛교회 주변은 40년 전 배 목사 부친이 심은 나무들이 아름드리로 자라고 있다. 배 목사는 “해마다 6월이 오면 아직도 부친의 음성이 성령의 음성으로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면서 “높이 세워진 40년생 거목 어디에선가 부친께서 주님의 지켜보심처럼 바라보고 계심을 느끼곤 한다”고 밝혔다.
배 목사는 가는 곳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이란 곡을 찬양한다. 찬양의 가사 그대로 잃었던 생명을 다시 주신 그 은혜는 세상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이다. 김 권사는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이며, 지금은 몰라도 그때가 되면 깨닫게 될 것”이라면서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호국 6월 당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戰場에도 하나님이 계셨다”
입력 2014-06-28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