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김 할머니는 당뇨병과 고혈압, 심장병을 수년 동안 앓아 왔다. 2∼3년 전 제법 먼 곳으로 이사했음에도 필자에게 계속 치료를 받으러 왔다. 특별히 잘해준 것도 없었는데 먼 길을 오느라고 숨차 하면서도 믿고 찾아와주니 주치의는 오히려 고마울 따름이다.
외래 방문 때 있었던 일이다. 김 할머니의 혈당이 평소보다 높게 나왔다. 이에 혈당이 많이 올라갈 만한 특별한 음식을 먹었는가를 물었는데 “남편이 타 준 커피를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김 할머니는 대답했다.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되는 대답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남편이 커피를 다 타 주느냐고 찬탄 반, 물음 반 섞인 말을 했다. 이에 커피는 물론이고 아침밥도 매일 차려 준다는 정말 뜻밖의 대답까지 듣게 되었다.
그러나 참 좋은 남편 분이 옆에 있어 행복하겠다는 나의 말이 그만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김 할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감정에 북받쳐서 그런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영감을 용서할 수 없어요. 지금 내게 아무리 잘해줘도 용서할 수 없어요.”
이어 김 할머니가 필자에게 털어놓은 말은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는데 시댁에서 구박을 받았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겉돌던 남편은 결국 집을 나갔고 자신이 생업을 꾸려나가야 했다. 몇 해가 지나서 남편은 병이 들어 그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고백을 통하여 김 할머니는 또 다른 병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는, 마음의 병이었다. 어린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듬뿍 받았어야 했는데 그 사랑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부부가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삶을 통해 마땅히 얻었어야 할 그 행복을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그 모든 불행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같이 살고 있는 남편이기에 지금 당사자가 아무리 자신에게 잘 대해 주어도 소용없는 짓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 용서란 얼마나 힘든 것이었던가!
오늘은 용서를 했지만 내일에도 여전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김 할머니는 집나갔던 남편이 돌아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 그날부터, 그리고 바로 어제까지 그 남편을 용서해 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용서가 어려운 것은 용서하는 힘이 우리들 속에 내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외부로부터 공급받았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단절되는 순간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을 다시금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김 할머니가 남편을 용서하기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용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의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김 할머니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다. 김 할머니의 매번 반복되는, 의지적으로는 용서해주어야 된다는 것과 실제 마음으로는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의 갈등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초래했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만성화되었고, 이 만성화된 스트레스가 김 할머니의 지병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날 진료실에 있었던 그 자그마한 사건은 필자에게 많은 후회스러움을 남겼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마 18:22) 용서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처방전이 그날 그 장소에서 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의사가 자신이 받았던 그 생명의 말씀을 꼭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기에 환자는 남편을 온전히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도 얻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동아대 의대 교수>
[김덕규 교수의 바이블 생명학] 김 할머니의 고백
입력 2014-06-28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