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동순 (5) 가난·궁핍의 나이지리아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입력 2014-06-27 02:47
1983년 12윌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시 중심가에 개장한 당시 카메룬 최대 규모의 백화점 타이가 아케이드.

1958년 내가 대학 문을 나설 때도 취업문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았다. 당시 내 목표는 취직이었고 나중에 사업가로 성공해 ‘취직시켜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진출은 꿈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1977년 대형 부도가 나지 않았더라면 아프리카 프로젝트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게 다 사전에 잘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착착 진행되는 것 같았다. 고등고시 불합격도 그렇고 동네 천막 가게 종업원에서 2000여명 직원을 거느린 대표이사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부도가 난 사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쉰이 넘어서도 나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 1년의 3분의 2 이상을 현지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나이지리아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에조’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나이지리아 군장구류의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자 에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금을 대고 내가 기술을 제공해 섬유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군장비는 수요가 1년에 한두 번에 그쳐 한계가 분명했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반면 현상인화 기술이 낮아 주로 유럽 쪽 기술을 통해 몇 주 만에 사진을 찾는다는 사실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 길로 나는 한국과 일본에서 기자재를 사고 한국인 기술자를 고용해 사진현상소를 차리게 됐다. 이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나는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카메룬 자이르 등에도 현상소를 설립해 서부 아프리카의 현상소, 타이가상사의 명성을 얻게 됐다.

아프리카의 시장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석유 다이아몬드 보크사이트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곳이었다. 여기에 우리나라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라 곳곳에 묻혀있는 엄청난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갔다. 83년 12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시 중심가에 타이가 아케이드라는 이름의 카메룬 최대 백화점을 세웠다. 여기에는 국내 16개 업체에서 일부를 임대해 주방기구, 화장용품, 스포츠용품, 조명기구, 가구, 완구, 액세서리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백화점 종업원은 우리나라 사람이 40명, 현지인이 60명인데 현지인 모집에는 1600여명이 응모했고 그중에는 장관이나 군 장성 등 사회지배계층이 줄을 대는 경우도 있었다.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지만 마음속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은 나이지리아에 있지만 마음은 늘 서울에 있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지난 45년이라는 세월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린 것에 대한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경영하던 회사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린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잊을 만하면 다시 살아나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굶주리고 배고픈 나이지리아 청년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리더가 되세요.” 아프리카에서도 나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매주 월요일 아침에 열리는 직원 예배에서 CEO가 되기를 꿈꾸는 현지인들에게 큰 비전을 제시했다.

80년 주(駐)나이지리아 공사로 온 홍순영이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다. 나보다 세 살 정도 어렸지만 생각하는 수준이나 마음 씀씀이는 되레 형 같은 존재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는 제일 먼저 홍 공사와 상의했다.

그때마다 홍 공사는 “나에겐 묻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시게.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지만 그분의 말씀은 차원이 다르다네. 서울에 가거든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을 한번 찾아가봐. 그분은 자네가 평생 동안 기대고 의지해도 좋을 분이지….”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