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M&A시장 뜨거운데… 국내 기업은 뒷짐

입력 2014-06-27 02:47
구글은 지난해 12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의미심장한 답신을 보냈다. SEC는 미국 이외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는 현금 자산의 사용계획이 무엇인지 질의했었다. 구글은 “앞으로 최대 300억 달러(약 30조8000억원)를 미국 이외 지역에서 기업 인수·합병(M&A)에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글이 해외에서 보유한 현금 자산은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345억 달러(약 35조원)에 이른다. 이 돈의 대부분을 M&A 실탄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구글은 ‘기업 쇼핑’에 적극적이다. 지난해 이스라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형 내비게이션 업체 웨이즈(Waze)를 비롯해 20개 기업을 인수했다. 올해도 원격 온도조절장치 같은 스마트 홈 기기를 제조하는 네스트랩스를 32억 달러에 사들이는 등 여러 분야에서 유망한 신생기업을 흡수하고 있다. 구글이 지난 10년 동안 인수한 기업은 약 130개에 이른다.

구글이 전방위적으로 M&A에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다양한 성장엔진 확보에 있다. 어떻게 변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장 상황에 대처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구글뿐만 아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은 물론 전통적 제조·서비스 업체까지 M&A에 뛰어들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불황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조짐이 보이자 너도나도 아껴둔 실탄을 아낌없이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M&A 계절이 오고 있다.

반면 국내 기업은 주춤거리고 있다. 새로운 성장엔진을 만들고, 덩치를 키워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몰락할 수 있다. 본격적인 경기 회복기에 달콤한 열매를 따먹을 수 없게 된다.

◇글로벌 M&A 시장 불붙었다=어느 때보다 글로벌 M&A 시장은 뜨겁다. 금융정보 분석기관인 딜로직에 따르면 올 들어 전 세계의 M&A 규모는 3조5100억 달러로 2007년 이후 최대 규모에 이르렀다. 올해 이뤄진 적대적 M&A는 2900억 달러(25건)로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0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M&A 증가 이유로 기업의 자신감이 크게 회복됐다는 점을 꼽았다. 경기 전망이 밝아지자 보수적 경영활동보다 공격적 사업 강화를 선택한 것이다. 블룸버그는 제약, 통신, 미디어, 인터넷 등에서 급격한 기술변화가 일어나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면서 M&A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미 구글, 애플, 아마존, 텐센트 등 글로벌 IT기업들은 M&A로 몸집을 불리며 로봇, 웨어러블 디바이스, 스마트카 등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구글은 최근 무인자동차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자동차업체를 M&A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4월에는 무인기 제조업체인 타이탄 에어로스페이스를 인수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은 올해 초 영국 무인기 제조업체인 애센타를 2000만 달러에 사들였다. 190억 달러를 들여 세계 최대 모바일 메신저인 왓츠앱을 인수하기도 했다. 가상현실 헤드셋 제조업체인 오큘러스VR을 20억 달러에 흡수해 새로운 SNS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올 들어 페이스북은 벌써 5건의 M&A를 성공시켰다.

특히 글로벌 IT 기업들은 세워진 지 3년이 안 되는 신생 벤처기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으로 무장한 벤처기업을 싼값에 인수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는 데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은 ‘멈칫’=국내 기업은 아직 눈치만 보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내 M&A 건수는 지난해 크게 위축됐다. 2010년 811건에서 2011년 629건, 2012년 525건으로 감소하다 지난해 400건으로 크게 낮아졌다. 재계 관계자는 26일 “경기회복에 대한 확신이 없는 데다 마땅히 돈을 풀 만한 사업 영역·모델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지난달 다음과 카카오가 합병을 발표하면서 시장에 불씨를 던졌다. 다음카카오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앞으로 M&A에 적극 나설 예정이다.

일부 기업도 차츰 M&A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롯데쇼핑은 5년 내에 해외에서 백화점 20개를 출점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M&A나 신규 투자를 저울질하고 있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상반기 롯데인천개발의 인천터미널 부지를 인수했고, 2012년에는 하이마트를 사들이기도 했다.

국내 기업이 M&A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기 불확실성에 있다. 경기가 여전히 바닥권에 머무른다면 자칫 ‘승자의 저주’(경쟁에서는 이겼지만 과도한 비용이 투입돼 오히려 위험에 빠지게 되는 상황)에 걸려들 수 있어서다. 잇단 M&A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성장했던 STX그룹이 무너지면서 재계에는 승자의 저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머뭇거리다가 경쟁기업에 뒤처질 수 있다. 외국인과 외국기업의 국내 M&A 금액은 2011년(19억7100만 달러)에 바닥을 친 뒤 지난해 49억7900만 달러까지 올랐다. 해외 시장은 물론 안방조차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꼼꼼하게 준비하고, 거품 없는 M&A를 성사시킨다면 단숨에 ‘미래’와 ‘현금’을 거머쥘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소형 건설장비 회사인 ‘밥캣’을 인수한 두산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두산그룹이 2007년 49억 달러에 인수한 밥캣은 한때 애물단지였다. 인수자금 가운데 39억 달러를 외부에서 빌려야 하는데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자금조달에 차질을 빚었다. 기업가치까지 떨어지면서 이중고를 겪었다. 밥캣은 2008∼2009년에 적자 규모만 2조5000억원을 기록했고, 모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자본금 1조원가량을 추가로 투입해야 할 정도까지 됐다.

암담하던 상황은 밥캣이 2010년 3분기부터 14분기 연속 흑자행진을 이어가면서 달라졌다. 이제 밥캣은 두산그룹의 든든한 캐시카우(cash cow·현금창출원)다. 재계 관계자는 “M&A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해 핵심역량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동시에 중소·벤처기업에는 제2의 성장기회를 준다”며 “경제 역동성을 높이기 위해 각종 규제를 걷어내고 M&A 활성화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