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명의 아이들이 매년 학교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학생도 성인도 아닌 이들은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은둔하거나 노동을 착취당하거나 범죄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국민일보는 이들에게 꿈과 자존감을 되찾아주자는 취지로 ‘꿈나눔 캠프’를 시작했습니다. 배달의 민족 애플리케이션으로 유명한 ㈜우아한형제들 김봉진(38) 대표가 고맙게도 캠프 참가 아이들의 멘토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김 대표와 아이들의 첫 만남을 소개합니다.
약속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아이들은 30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주문해놓은 피자는 온기를 잃어가고 만남을 주선한 사람들은 속이 타들어갔습니다. 학교 이탈 위기에 있는 아이들과 만날 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벤처기업가 중 한 명이 멘토가 되는 날입니다. '지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사규(社規)를 내건 최고경영자(CEO)였죠.
아이들은 7시가 다 돼서야 나타났습니다. 약속 장소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쪽의 한적한 도로변에 있는 회사 10층 회의실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창밖으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롯데월드 놀이시설에 시선을 빼앗기더니 "야간 개장 가요" 한 아이가 소리치자 다른 아이들도 조르기 시작했습니다.
김 대표와 국민일보 '꿈나눔 캠프' 아이들과의 첫 대면은 이랬습니다. 캠프에는 지금까지 18명이 참여했습니다(국민일보 6월 11일자 1·4·5면 참조). 캠프 뒤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인물과 '멘토-멘티'로 이어주는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모두 22명이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지난 23일 ㈜우아한형제들 본사에서 김 대표를 만났습니다.
청바지와 운동화… 동네 형 같은 CEO
캠프 아이들과 외부 인사의 만남에는 언제나 긴장감이 만들어집니다. 아이들이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다반사였고 귀찮을 경우 아예 잠적해 나타나지 않기도 합니다. 만남이 이뤄져도 눈앞에서 딴청하거나 대놓고 잠을 자기도 해 주선자들을 난처하게 하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기성세대에 반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성을 갖고 대화하려는 어른들에겐 마음의 문을 엽니다. 김 대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 대표는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에 운동화 차림이었습니다. 빡빡 깎은 머리에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건 자신이 '경영하는 디자이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아이들 눈에는 그냥 편한 '동네 형'처럼 보이는 듯했습니다. 벤처업계에서 손꼽히는 명사라는 인상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직원 120명을 거느린 '잘나가는' 벤처기업인입니다. 회사명은 낯설지만 '배달의 민족'이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은 유명합니다. 누적 다운로드 1100만회(2014년 5월 기준)를 넘겼습니다. 최근에는 배우 류승룡이 등장하는 TV광고로 더욱 입소문을 타고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 '수렵도', 프랑스 화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등을 재치 있게 패러디하고, '다이어트는 포샵으로' 등 광고 카피로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좋은 대학? 기죽지 마라"
다행히도 김 대표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옛날에는 나도 그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피자를 먹으며 아이들에게 했습니다. 롯데월드와 피자에 정신이 팔렸던 아이들은 "난 공업계 고교 꼴찌였다"며 김 대표가 운을 떼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화가가 꿈이었던 김 대표는 예술고 진학을 원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공고에 가게 됐답니다. 김 대표의 아버지는 다른 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김 대표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좌절한 그는 방황했다고 합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동네슈퍼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자전거도 훔쳐 타는 등 비행을 일삼았습니다. "고교시절 하루 담배 두 갑씩 피웠다. 그래서 키가 안 큰 것 같다" "공부는 42명 중 40등이었다. 뒤에 두 명은 운동부였다"라며 아이들을 웃겼습니다. "방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아예 집이 없었다. 부모님이 식당을 했는데 손님 다 가면 테이블을 밀고 잠을 잤다. 이게 내 어린시절"이라고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지나치게 암기를 강조한다. 암기는 수많은 공부법 중 하나일 뿐인데 이걸로 아이들 줄을 세운다. 좋은 대학 들어가는 건 20대의 성공이다. 40대 때 성공해도 나쁘지 않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면 지망생으로 20대를 보내지 말고 40대에 JYP엔터테인먼트 같은 걸 세우는 꿈을 꿔라."
"창의력은 근면 성실에서 나온다."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려는 경수(가명·17)가 성공 요인을 물었습니다. 김 대표는 '근면 성실'이라며 일화 하나를 들려줬습니다. 디자이너로 일할 때 포털 사이트에 2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사진이나 영상, 글을 올렸답니다. 아이가 아픈 날도, 밤샘 야근을 한 날도 빠짐없이 했습니다. 매일 8건씩 올렸고 디자이너 사이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세상의 흐름을 읽는 눈을 갖게 됐고 성공적인 사업의 밑바탕이었답니다. 그는 "창의력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는 게 아니다. 꾸준한 훈련이 필요하고 성실성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규에 '지각 금지'를 내건 이유랍니다.
사업 실패 스토리도 흥미로웠습니다. 가구사업을 시작했으나 단순히 예쁜 가구에 집착해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아 "쫄딱 망했다"고 했습니다. 지인들의 소개로 네이버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승진에서 밀려 후배들을 윗사람으로 모시게 된 아픔, 절치부심하며 '배달의 민족' 사업을 준비하면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아파트 경비원들에게 음료수를 바치며 전단지를 모았던 얘기, 연매출 수백억원에 이르는 벤처 기업으로 성장시켜 네이버와 파트너가 되는 대목에서 아이들은 완전히 몰입했습니다.
아이들과 김 대표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인철(가명·17)은 배웅 나온 김 대표에게 그의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김 대표는 당장 들어오겠다는 인철에게 "성실히 학교 마치고 3∼4년 뒤쯤 지원해라. 꼭 입사지원서에 오늘 얘기를 적어라"고 당부했습니다.
글·사진=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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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6-26 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