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동순 (4) 회사 부도로 교도소… 눈만 뜨면 성경·영어공부

입력 2014-06-26 03:26
조동순 회장이 1983년 아프리카 아이보리코스트에 설립한 타이가 사진 현상소에 현지인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4千萬원 不渡혐의 第一重織 代表 拘束(속보=삼성물산 관리업체인 제일중직 및 제일후직에 대한 수사를 해온 서울지검은 7일 두 회사 사장을 겸하고 있는 조동순(曺?純)씨가 4천4백여만원의 부도수표를 낸 혐의를 잡고 부정수표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날벼락이었다. 1977년 2월 7일 꽁꽁 얼어붙은 이른 새벽. 나는 당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한 조간신문 사회면(7면) 오른쪽 하단에 집게손가락 크기(세로 7㎝ 정도)로 장식된 기사를 보고 난 뒤에야 죄인이 됐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전날 삼성물산 사장실에서 이 모 사장님을 기다리던 중 난데없는 형사 2명에게 붙잡혀 난생 처음 수갑을 차고 교도소로 끌려갔다. 검찰에 잡혀가 조사 받는 과정에서 내가 발행한 1000만 달러(100억짜리 당좌수표)가 부도났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나는 아내가 말했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교만과 탐심으로 자족하지 못하면 여지없이 고난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힘들고 어려울 땐 기도의 배를 타세요.”

만시지탄이었다. 회사와 2000여명의 직원, 그 가족들에게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날부터 교도소 내 비치용 성경책과 함께 ‘잉글리시900’(영어회화 교재)에 푹 빠져 살았다. 눈만 뜨면 성경과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복역한 지 6∼7개월 됐을까. 반가운 친구 둘이 면회를 왔다. 유엔 대사를 지낸 박수길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홍순영이었다. 고려대 법대를 나온 박수길은 해인사에서 고등고시 공부할 때 한 방을 썼던 친구다. 고등고시 시험 보러 올라와서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 출신의 홍순영을 소개시켜줬다. 홍순영은 자신이 정리해 놓은 ‘족보노트’를 기꺼이 빌려줬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노트를 빌려준 이는 2등을 하고 정작 박수길이 1등으로 합격한 것이었다. 둘은 이후 외무부를 좌지우지했다. 박수길이 매번 한발 앞서 나갔고 홍순영은 그의 그림자를 따랐다. 수길은 탁월한 외교관 기질이 있는 친구였다. 나는 6년 동안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공부해도 패스하지 못한 고등고시를 박수길은 6개월 공부해서 1등으로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비범했다. 홍순영은 나중에 외무부 장관을 먼저 지냈고 박수길은 유엔 대사를 역임했다.

“니, 여기서 뭐하노? 밥 한번 거나하게 산다고 안했나?” 두 친구는 죄수복을 입은 나에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오지 않겠느냐면서 몸 건강히 잘 지내기를 기도했다. 그러면서 홍순영은 풀려나면 자기와 함께 나이지리아에 가자고 했다. 두 친구가 면회를 다녀간 지 오래지 않아 배임과 횡령 등이 무혐의로 판명돼 7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됐다. 출옥하자마자 나는 회사를 차렸다. 아프리카 정서에 맞는 이름으로 ‘호랑이’(타이가)만한 것이 없었다. 고려대의 상징이기도 한 타이가(他利加)는 ‘타인의 삶을 이롭게 한다’는 이웃사랑의 의미가 담겨 있는 아주 특별한 이름이었다.

회사는 차렸지만 국내에선 왠지 사업하기가 싫었다. 7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생활에 염증이 나기도 했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펼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8년 나는 홍순영의 인도대로 검은 대륙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땅을 처음 밟았다. 한인교회는 낯설고 물 선 타국 생활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주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홍순영이 소개해준 나이지리아 한인교회는 나에게 큰 위안이 됐다. 30∼40명 교인들이 똘똘 뭉쳐 날마다 기적을 이루는 코리아 환상곡을 만들어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모두 사진 촬영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면 무려 한 달 이상이나 걸렸다. 그래서 한국인이 하는 빠른 사진현상소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