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변창배] 평화의 일꾼

입력 2014-06-25 03:09

오늘은 64년 전에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날이다. 6·25를 맞으면 실향민 2세인 탓인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지고, 고향마을을 바라보려고 교동도를 찾으시던 선친이 그리워진다.

3년이 조금 넘는 동안 벌어진 6·25전쟁은 한민족 역사 이래 최악의 전쟁이었다. 6·25전쟁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폭탄보다 더 많은 폭탄이 손바닥만한 한반도에 떨어졌다. 남북한 군인을 포함해서 모두 552만여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 중에는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이 125만명 이상 포함돼 있다.

전쟁으로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 그리고 교통시설이 파괴됐다. 한반도는 초토화됐다. 10만명이 넘는 전쟁고아가 발생해 길거리를 헤매었다. 1000만명을 헤아리는 이산가족은 가족 상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오늘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 간에 분단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6·25전쟁은 남북한 간 전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북한을 포함해서 모두 20개 국가의 군대가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자금을 제공하거나 의무병을 파송한 국가까지 포함하면 참전 국가는 50개 국가나 된다. 2.5차 세계대전이라고 할 만하다. 6·25전쟁의 결과로 남북 분단은 정전상태로 고착화됐다.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굳어지기 시작한 동서냉전도 본격화됐다. 세계가 두 블록으로 나누어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전기가 된 것이다.

6·25전쟁만이 아니다. 1876년에 조선이 개항을 한 이래 1세기 동안 한민족은 수차례 국제전에 휘말렸다. 1894년 청·일전쟁을 시작해서 러·일전쟁, 의병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독립전쟁 그리고 월남전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전쟁들은 전쟁의 승패에 따라서 동아시아와 세계의 패권이 갈렸을 만큼 큰 규모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전쟁이 한반도를 무대로 해서 전개된 탓에 죄 없는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개항 이후 한 세기는 국제전으로 바람 잘 날이 없는 시기였다.

기독교 선교는 이런 전쟁의 와중에 이루어졌다. 개항이 되던 해인 1876년에 중국 만주에서 백홍준과 세 조선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1885년에 들어온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곧 전쟁의 소식을 듣게 된다. 1905년에 러·일전쟁이 끝난 뒤 장로회 독노회가 설립됐고, 1910년 식민지가 된 뒤에 장로회 총회가 창립됐다.

1960년대 민족복음화 운동이 전개될 때까지 한국교회는 늘 전쟁의 그늘 밑에 놓여 있었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성장은 이런 전쟁의 피바람을 벗어난 직후에 이루어졌다. 분단과 갈등이 지속되었지만 전쟁의 포화를 벗어난 것이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남북한이 160만명 이상의 군인으로 대치하고 있다. 경제적인 번영도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평화의 일꾼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6·25전쟁 64주년을 맞는 오늘은 참된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변창배 목사 (예장통합 총회기획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