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일자리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쌀독은 늘 허기진 상태였고 이화여대 ‘학과 퀸’ 출신의 아내 얼굴에도 미소가 사라졌다.
“합격만 하면….” 마냥 ‘응시효과’(고등고시)만으로 버틸 순 없었다. 6년 동안 고등고시에 매달렸지만 허송세월만 하고 말았다. 정치판에도 눈을 돌렸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돌아섰다. 마침내 손때 묻은 수십 권의 책과 노트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어렵사리 사업 자금을 마련해 경험도 없는 규석광산 사업과 ‘갈포벽지’ 사업에 손을 댔다.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고 빚만 잔뜩 짊어졌다.
연탄 50∼60장만 있으면 겨울을 날 수 있었지만 그마저 형편이 안 됐다. 단칸방 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자 주인은 당장 방을 빼라고 윽박질렀다. 어쩔 수 없이 집세가 더 싼 서울 구로구 천왕동 논 한가운데에 있는 전셋집으로 밀려났다. 이때까지 별 말이 없던 아내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여보, 제가 나가서 일을 해야겠어요. 교사자격증은 둬서 뭣하겠어요.”
아내는 내 눈치를 봐가며 은밀한 제안을 했다. 다행히 남대문중학교에 시간강사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듣고 바로 지원했는데 당장 출근해도 좋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아내는 왕복 4시간 걸리는 출퇴근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오갔다. 아내가 출근하면 집안일과 3남매를 돌보는 것은 내 차지였다.
가장이 변변치 못해 아이들 엄마까지 등 떠민 것 같아서 맘이 편치 않았다. 새벽녘에 하도 가슴이 답답해 밖으로 나오니 언덕 위에 있는 교회에서 종지기가 새벽종을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아프게 가슴을 때렸던지…. 종소리가 그칠 무렵 나는 정신을 차리고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제발 나에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출근하는 아내의 그림자를 밟고 무작정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먼 친척 동생이 운영하는 조그마한 천막 가게였다. “고시공부 하던 고매한 분이 이 험악한 일을 어째….” 친척 동생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나는 악착같이 천막과 씨름했다. 나를 위해 청춘을 포기한 아내와 철부지 3남매를 굶길 순 없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자급자족 정책’으로 모든 군수품을 수입하지 않고 국내 생산 공장이 조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몰라보게 덩치가 커진 가게는 어느새 큰 회사가 됐다. 군수물자 납품 업체로 지정된 회사는 매년 300% 이상 성장률을 보였다.
67년 마침내 나는 제일후직㈜ 대표이사가 됐다. 부산 공단에 직원이 1000명 정도 일하는 큰 회사로 변했다. 1년 후에는 제일중직㈜ 대표이사까지 맡고 경기도 용인 포곡면에 직원 1000명 규모의 공장도 신설했다.
갑자기 회사가 커지니까 사돈의 팔촌 등 알고 지내는 사람 대부분이 취직을 부탁했다. 나는 이들의 손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받아들였다. ‘너무나 일을 하고 싶었던 나의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직원이 엄청나게 늘어남에 따라 인건비도 많이 들어갔다. 전문 경영인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회사는 나날이 발전했다.
그러다가 결국 대박이 터졌다. 1000만 달러(100억원)짜리 신용장을 받은 것이었다. 생산 라인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무조건 밀어붙였다. 당좌수표 5억원을 발행하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일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아내에게 자랑하면서 이제 교사직을 그만둬도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사업이 잘된다고 자만하시면 안 돼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시지 않아요.”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동순 (3) 남대문시장 천막 가게에서 제일후직 대표이사로
입력 2014-06-25 03:15 수정 2014-06-25 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