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동순 (2) 믿음의 일가 이룬 외할머니의 애잔한 기도 소리

입력 2014-06-24 03:12 수정 2014-06-24 20:31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경남 ‘의령 상정리 조씨고가’ 사랑채 앞에서 필자(맨 왼쪽)와 삼영화학을 창업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 이종환 이사장(가운데)이 고택을 둘러본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의령 상정리 조씨고가(宜寧 上井里 曺氏古家)’. 경남 의령군 화정면 화정로3길 13(상정리 471의 2). 우리 집은 내가 태어난 지 60년 만인 1993년 12월 27일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창녕 조씨의 종가(宗家)이지만 누가 언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건물의 배치는 전체적으로 조선시대의 부유한 농가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데 안채를 중심으로 구성된 ‘ㅁ’자 형태이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화려한 팔작지붕을 연출함으로써 집주인의 부유했던 경제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몰락한 빈농에 불과했다. 건물의 구조는 왼쪽부터 부엌 큰방 대청 건넛방 누마루가 배치돼 있다. 부엌 앞쪽에 방을 마련하여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밖에도 사랑채, 행랑채, 곳간 및 디딜방앗간, 가묘(家廟), 별채, 마구간, 대문간 등을 갖추고 있다. 우리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한 시기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17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여러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 따라서 이 집의 건물들은 구조와 세부 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기별로 건축의 양식이나 특징을 연구하고 비교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나는 집만 덩그러니 큰 우리 집보다 고성 학동 외갓집이 더 좋았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시인으로 78세에 돌아가셨다. 손자 최재호 박사도 시인으로 진주 삼현여중고를 창립했다. 최 박사는 할아버지의 한시를 번역해서 ‘하정시집(夏亭詩集)’을 세상에 펴내 외손과 친손들이 다 읽고 감동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에 갔다. 학동까지는 아침 일찍 떠나도 해거름에야 도착한다. 의령에서 진주까지 70리(약 28㎞) 길을 버스를 탄 뒤 다시 고성 가는 버스를 타고 하일면 소재지에서 내려 동산이재라는 높은 재를 넘는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꿈결 같은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가 그림같이 펼쳐진다. 난생 처음 보는 바다는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다. 산 아래 기와집이 소복이 모여 있는 제법 큰 동네에 외갓집이 있었다.

어머니의 꿈 많던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의 추억이 배어 있는 고즈넉한 동네다. 동백꽃이 발갛게 피어있고 어디선가 유자향기가 풍겼다. 구순 문턱에 들어선 외할머니는 빨갛고 두꺼운 책을 돋보기를 쓰고 읽고 계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만나자 ‘어무이∼’ 하면서 우셨다. 얼마나 그리웠으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부터 흘렸을까. 그런 막내딸을 보고 외할머니도 울고 또 우셨다. 나와 여동생의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다. 유교 집안이자 양반 댁이라고 이름난 집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받아들였을까. 이상한 전염병이 돌았다. 하루에 19세, 23세 남매를 잃은 외할머니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서 실성하셨단다. 외할아버지는 남부끄럽다고 산속에 별장을 지어 공부하셨던 ‘서재골’로 들어가셨다. 그때 한 전도사가 외할머니를 전도해서 믿음을 가졌다고 하셨다. 나중에 외조카가 어머니가 사시는 서울 개포동 집에 와서 외할머니 돌아가실 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시는 날 며느리들에게 밖에 천사가 금수레를 타고 데리러 왔다고 하시면서 편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가셨다고 했다.

“숙현아! 그라모 나도 천국 가모 어무이 만나보것네!” “하모요, 징조 할무이가 천국에 꼭 계실 낍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열심히 교회 나가시고 저녁식사 후 기도가 시작되면 끝날 줄 몰랐다. 그렇게 완고하셨던 아버지도 목사님께 자기 장례식을 부탁할 만큼 믿음이 있었다. 외할머니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 주셨는지 우리 오남매에게도 씨가 돼 모두 신앙생활을 잘하게 해주셨다. 외할머니는 우리집안 믿음의 조상이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