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부인과 자녀들이 있는 사업가 A씨는 1990년대 후반 사업차 필리핀으로 건너가 현지 여성 B씨를 만났다. A씨는 B씨와 동거하며 아들 C군(16)과 D군(14)을 낳았다. 그는 2000년대 중반 사업을 정리하고 돌연 한국으로 귀국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B씨는 2012년 A씨를 찾으려고 한국에 왔다. 아무 연고도 없는 B씨로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단서는 A씨의 이름과 생년월일, 모임에서 찍은 단체사진뿐이었다. 각종 사회단체들은 이 정도 정보만으로는 신원 특정이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식당 등에서 일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온 B씨는 설상가상 체류기간이 지나 불법체류자로 몰릴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이주여성 긴급지원센터를 통해 만난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같은 해 12월 A씨를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
소송을 낸 후에도 A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법원은 주민센터와 안전행정부 사실조회를 거친 끝에 A씨의 신원을 특정했다. 하지만 A씨는 재판에서 혈연관계 확인에 필요한 유전자 검사를 거부했다. 한국 가정생활이 파탄날 수 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법원이 강제 검사 명령을 내리고 수백만원대 과태료를 고지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유전자 검사가 이뤄졌다. 검사 결과 A씨와 아이들은 부자관계인 것으로 밝혀졌다.
1년6개월 재판 끝에 서울가정법원 가사2단독 권양희 판사는 최근 C군과 D군의 청구를 받아들여 “아이들이 A씨의 친생자임을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이 확정되면 B씨는 A씨에게 자녀 양육에 필요한 양육비 등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를 둔 이른바 ‘코피노(Kopino)’가 법원 판결을 통해 친자 관계를 확인받기는 사실상 처음이어서 유사 소송이 이어질 경우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 코피노는 현재 1만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B씨를 무료로 대리한 조동식 변호사는 22일 “대부분 코피노들이 아버지의 구체적 인적사항을 몰라 소송까지 가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들이 법적으로 도움 받을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
코피노의 아빠 찾기… ‘친자 확인’ 첫 승소
입력 2014-06-23 0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