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담화 검증 역풍… 美 “말 안듣는 일본” 불쾌감

입력 2014-06-23 02:43
미국 정부는 일본이 고노(河野) 담화 검증 결과를 발표한 데 대해 공식 성명을 내지 않았다. 지난해 말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을 당시 “실망했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반응을 내놓은 것과 차이가 있다.

젠 사키 국무부 대변인은 20일(현지시간)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의 관점은 일본이 무라야마 전 총리와 고노 전 관방장관 사과를 계승하는 게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중요하다는 입장”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은 고노 담화를 지지한다고 아베 정권의 입장을 밝힌 일본 관방장관의 성명에 주목한다”고 강조했다. 검증 결과가 고노 담화의 신뢰성을 뒤흔드는 발표임에도 불구하고 ‘고노 담화를 수정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의 발언에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비쳐진다.

하지만 이런 ‘공식’ 반응과 달리 백악관과 국무부 관계자들은 검증 결과 발표에 상당히 불쾌해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브루킹스연구소의 동아시아 전문가는 2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미국은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이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변화된 모습을 보이라고 강하게 일본을 압박해 왔다”면서 “(이번 발표로) 국무부의 입장이 더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한·일 과거사 현안 중에서도 위안부 부분은 미국이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며 일본에 명확한 입장 변화를 공식 요구해 온 사안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말 방한 때 위안부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끔찍하다, 지독하다, 쇼킹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급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 핵문제 공동 대응을 위해 한·일 관계 개선이 급선무라고 생각해온 미국은 일본에 ‘자숙’을 강하게 요구하는 한편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도 이제 변하고 있다고 설득해 왔다. 하지만 검증 결과 발표로 이런 노력이 허사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아울러 주요 동맹국 일본이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라는 주문에 반기를 든 모양새여서 미국의 리더십에도 상처가 나게 됐다. 앞서 일본이 납북피해자 재조사와 독자제재 해제를 골자로 북·일 합의를 이끌어내고, 서방의 제재를 받는 러시아의 세르게이 나리슈킨 하원의장의 방일을 허용했을 때에도 미국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지적이 나왔었다.

이번 사안이 공교롭게도 내달 초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불거져 나와 미국으로서는 신경이 예민해진 분위기다.

하지만 국방예산 감축으로 대일(對日) 안보 협력 의존도가 더욱 높아진 상황이어서 미국이 일본을 강하게 제어할 수단이 없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