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믿음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순교로, 피땀으로, 새벽예배로,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며 섬겨온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언제나 이 땅의 희망이 되어 왔습니다.
다음 세대에도 교회는 희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현실에는 어두운 면도 적지 않습니다. 대외적으로 이단이 창궐하고, 기독교를 폄하하고 깎아내리려는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방향이 문제입니다.
사방(四方)을 둘러봐도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 사람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사방이 막히면 절대적인 절망과 고독이 찾아옵니다. 사방이 막힌 상황을 뜻하는 고사성어가 바로 사면초가입니다. 한때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초나라의 항우는 자신을 둘러싼 한나라 군대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절망에 빠져 자결했습니다. 요즘도 사방이 가로막혀 사면초가에 빠졌다며 한강 다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서는 사방이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네 방향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5의 방향’, 즉 저 위를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그곳은 감옥에서 죽을 순간만 기다리던 베드로와 바울과 실라가 바라봤고, 결국 상황을 반전시킨 방향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도 바로 그곳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저 위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그렇지 못했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저 위가 맞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불교는 이 땅에 있는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합니다.
방향을 저 위로 정하는 문제는 모세에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까지 달려온 길을 돌아보면 모두 수평적 이동이었습니다. 애굽을 떠난 것도, 홍해를 건넌 것도, 광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 위에서 부르셨습니다. 거기서 민족이 살아갈 방향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방향이 저 위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온 산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위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향은 저 위입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저 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저마다 목표를 향해 힘겹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수평적 방향이었다면, 세상적인 목표가 삶의 기준이었다면 이제 저 위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왔다는 회개와 자성(自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저 위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좇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방향을 새로이 설정할 때가 됐습니다. 방향을 잃고 방황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부터 회개하고 자성합시다.
최영섭 마을안교회 목사
[오늘의 설교] 방향이 문제다
입력 2014-06-23 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