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기독교 사관을 둘러싸고 논란이 적지 않다. 조선말의 피폐상, 식민지로 전락, 갑작스러운 해방, 분단, 6·25전쟁 등에 대해 그는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 모든 고난이 영글어서 오늘의 번영 한국이 있다고 진단했다. 교회에서 한 강연이기에 기독교 교리적 접근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일제의 지배,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니 반민족적 역사관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평가는 각자의 몫이지만 논란의 핵심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차분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논란을 지켜보면서 함석헌(1901∼89)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초판 1950)가 떠올랐다.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관점에서 기술한 이 책은 문 후보자의 시각과 겹쳐지는 측면이 있다고 봤다.
제목에 있는 ‘뜻’이란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이 책은 원래 30년대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것인데 당시 제목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었으며 초판 서문에도 “이 글이 글 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사를 ‘세계사의 하수구’에 비유할 정도로 고난으로 점철된 사실에 대해 뜻을 찾는 데 시종한다. 하지만 고난의 한국사는 천박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분명한 한민족의 사명이, 뜻이 있었다고 그는 본다.
“우리 사명은…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하지 않고 회피도 하지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막연히 감상적으로 하는 말도 아니요, 억지의 곡해도 아니요, 시적으로 하는 비유도 아니다. …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을 위하여, 또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져야 한다.”
고난은 불의에서 비롯됐지만 성찰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난의 짐을 지는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를 자문자답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했다고 하면 그것은 미신이다. 반대로 그것은 다 우리 잘못이라고 하면 독단이다. 비과학적이다. 하나님도 없고 우리 죄라는 것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억지이다.”
함석헌의 분명한 답은 그 같은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고난 한복판에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절대자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일부러 불의의 고난을 떠안기시겠냐는 고백이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라고 주장한다.
비슷한 경우가 미국 매사추세츠주(州)에서 활동하는 유대교 랍비 해럴드 쿠쉬너의 고백이다. 쿠쉬너는 장남 아론이 3살 때 프로게리아라는 조로증에 걸려 14살에 요절한 비통함을 담아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1981)라는 책을 썼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신자든 목회자든 이웃의 비통과 절망과 마주칠 때 함께 아파하기보다 하나님을 앞세워 설교하는 데 더 힘쓴다고 지적한다.
그 자신도 그동안 목회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요” “뭔가 계획이 있을 거예요” “크고 멀리 보세요. 지금의 절망감이 당신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위해서 기도할 게요” 등등의 말을 쏟아냈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바로는 그런 말들은 위로가 못 된다고 쿠쉬너는 단언한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이 문 후보자에게 크게 반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나온 고난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교리적 용어를 앞세웠을 뿐 하나님이 그 고난의 현장에 함께했었고 동행했노라는 고백이 빠진 데 대한 말할 수 없는 자존감의 훼손을 느꼈던 것이라고 본다. 섭리는 고백적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존재의의가 약한 자와 낮은 자와 늘 함께하겠다는 고백에 있음을 다시금 새기지 않을 수 없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조용래 칼럼] 섭리는 고백적으로 받아들일 때 빛난다
입력 2014-06-23 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