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20개월 재조사 후 위안부 강제 동원 인정

입력 2014-06-21 02:31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일 과거사 현안으로 본격 부상한 것은 1990년 6월 일본 정부가 국회 답변을 통해 “종군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려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다. 일본 정부 발뺌에 한국여성단체 등은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위안부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1997년 작고)씨 등 3명은 91년 12월 도쿄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모집 등에 관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방위청 자료가 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에 보도됐다. 이틀 후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은 “군의 관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담화를 발표했고 한국을 방문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공식 사죄했다. 일본 정부는 92년 7월 6일 1차 조사 결과를 내놨지만, 위안부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혀 한국 등이 강력 반발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차 조사에 착수했으며 93년 7월 26∼30일에는 조사단이 서울에 파견돼 위안부 생존자 16명을 상대로 증언 청취 작업을 벌였다. 5일 후인 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이 조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발표한 게 바로 고노 담화다.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일본 정부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1년8개월 조사를 거쳐 발표된 고노 담화의 정식 명칭은 ‘위안부 관련 조사 결과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로, 그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의 여성이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낸 문제”라고 인정했다.

고노 담화는 ‘강제’라는 표현의 정의를 “본인의 의사에 반해 행해진 것”이라며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 하에서 참혹한 것이었다”고 표현했다.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는 점도 중요하다. 여기에 위안부 모집과 관련해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지만 그 경우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관헌 등이 여기에 가담한 일도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적시하고 있다. 담화는 “우리는 이 같은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일 없이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담화가 위안부의 모집 주체가 일본군이었는지, 업자인지 여부를 애매하게 했다는 지적이 많다. 위안소의 건물과 규칙, 음료 등 필요한 시설과 물품 등을 일본군이 준비한 상황에서 이를 명백하게 인정하지 않은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제훈 기자 parti98@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