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한 곡(曲)의 춤과 같다고 했던가. 팔순을 넘기면서 지나온 세월의 파란곡절을 더듬자니 마치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엎드려 오열하고, 다시 일어나 용기백배 날아오르다 어지러이 돌아가는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나는 경남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심부름을 잘하고 똘똘해 마을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진주중학교에 다닐 때는 장래 큰 지도자가 돼 고향 사람들에게 보답하려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운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배구부장, 웅변부장, 부운영위원장을 맡는 등 바쁜 학창시절을 보냈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어 진학할 수 없게 됐다. 며칠을 두문불출하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 진주고 교장실을 찾았다.
“이번에 입학시험을 본 조동순입니다. 합격은 했는데…돈이 없어서 우야면 좋겠습니까.”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시던 교장 선생님은 수험번호와 이름을 적어 놓고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하셨다. 아마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조동순이라…. 자네 같은 학생이 돈이 없어 입학할 수 없다는게 말이 되나? 우리 학교의 손실 아이가.” 교장 선생님은 나에게 집에 가서 되는 대로 돈을 구해 오라고 하셨다.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집에 돈이 될 것이라곤 돼지 한 마리밖에 없었다. 재산 목록 1호인 돼지를 팔고 이웃 어른들이 보내 준 계란을 모두 팔았지만 등록금의 반이 채 못 됐다. 그 돈을 가지고 교장실에 갔다.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생각하시더니 서무과장을 불렀다.
“이놈한테 책걸상을 내주소.” 그 후 나는 고등학교 3년간 등록금 한 푼 안 내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분은 내 인생길에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멘토가 되셨다. 바로 강정용 교장 선생님이다. 강 선생님은 진주중·고와 보성고 교장을 지냈다. 강 선생님의 장남은 에디슨과 노벨 등이 이름을 올린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2009년 2월에 헌액된 고(故) 강대원 박사다. 강 선생님은 서울 보성고 교장을 마지막으로 정년퇴직, 아들과 딸은 미국에 유학을 보내놓고 명륜동 작은 집에서 외롭게 지내고 계셨다.
주말이면 빠짐없이 찾아가 내외분을 모시고 서울근교로 바람을 쐬어 드리고 약주도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가보니 미국에 유학 중인 아들과 딸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부랴부랴 직원들과 같이 묘소도 구하고 무사히 장례를 치렀다. 강 선생님의 장남 강 박사와 가족들은 장례식 후 도착해 나에게 감사의 예를 표했지만 난 되레 죄인 아닌 죄인이 된 것 같아 고개를 바로들 수 없었다. 잘 모시지 못한 자책감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남을 도울 수도 있고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도움을 받은 이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란 거의 없다. 다행히 나는 일평생 동안 가장 큰 은혜를 입었던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지켜드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린다.
나는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해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는 류현진 선수를 좋아한다. 그는 서른이 채 안 된 나이지만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바로 ‘전력투구’다. 공 한 개에 사력을 다하는 모습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기특하다. 나는 오늘도 그의 건승을 기도한다. 지난 81년의 세월을 글로 쓰기 시작하니 그저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하다. 날아갈 듯 예쁘게 차려입고 무대에 오른 발레리나의 삶을 상상해본다. 이 순간이 있기까지 수십 번 발톱이 빠졌고 발바닥은 굳은 살가죽으로 변했다. 내가 살아온 팔십 여정도 이와 같다. 인생은 한 곡의 춤과 같구나 하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약력=1933년 경남 의령 출생. 58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67년 남대문 천막가게 취업. 68년 제일후직 대표이사. 70년 제일중직 대표이사. 78년 ㈜타이가 설립. 98년 주한 카메룬 명예영사. 현 타이가 회장. 분당 예수소망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조동순 (1) 팔순 내 인생, 파란곡절의 한 곡 춤사위였다
입력 2014-06-23 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