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호 태극전사들 “미치도록 즐기고 싶고, 미치도록 이기고 싶다”

입력 2014-06-21 02:05
2002 한일월드컵 당시 거스 히딩크 대한민국 감독은 강호들과의 경기를 앞두고 주눅이 든 태극전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월드컵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 없는 기회야. 승패에 상관없이 즐기도록 해!”

무조건 이기라는 강요만 받아 왔던 태극전사들은 충격을 받았다. 무아지경으로 경기를 즐긴 선수들은 4강이라는 기적을 연출했다. ‘히딩크 매직’의 비밀은 바로 경기를 즐기는 것이었다. 이후 ‘즐기는 축구’는 한국 축구의 DNA가 됐다.

그러나 ‘홍명보호’의 태극전사들은 최근까지 축구를 즐기지 못했다. 지난 10일(한국시간) 가나와의 평가전에서 0대 4로 참패한 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행히 선수들은 중압감의 포로가 되진 않았다. 그들은 지난 18일 브라질 쿠이아바에서 열린 ‘북극곰’ 러시아와의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1대 1 무승부)을 맘껏 즐겼다. 이제 ‘사막 여우’ 알제리와의 2차전(23일 오전 4시·포르투알레그리)도 제대로 즐기겠다고 벼르고 있다.

홍명보호는 20일 포스두이구아수에서 가벼운 훈련을 하며 알제리전에 대비했다. 훈련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대표팀은 3개 팀으로 나뉘어 볼 뺏기와 미니게임을 했다. 팀을 나눈 기준은 키였다. 키 1m96의 장신 공격수 김신욱이 가장 앞에서 손을 들고 “기준”을 외치자 나머지 선수들이 뒤에서 도토리 키재기를 했다. 선수들은 서로 키를 재며 낄낄거렸다. 비장함만을 강조했던 역대 대표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태극전사들은 “미치도록 즐기고 싶고, 미치도록 이기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대표팀의 중앙 수비수 홍정호는 훈련을 마친 뒤 “최대한 즐긴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나서고 있다”며 “이겨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비장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전을 즐긴 태극전사들은 자신감도 되찾았다. 공격수 지동원은 “선수들이 러시아전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했다”며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알제리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대표팀에서 월드컵을 가장 즐기고 있는 사람은 홍명보 감독이다. 그는 선수로 네 차례, 코치로 한 차례 월드컵을 경험했다. 이번엔 사령탑으로 여섯 번째 월드컵 무대를 밟은 그는 상대국 감독과의 지략 대결을 즐기고 있다.

러시아 사령탑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한국과의 1차전을 앞두고 “한국 선수들의 이름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자만했다. 홍 감독은 그저 웃어 넘겼다. 홍 감독은 이미 러시아 선수들의 모든 것을 우리 선수들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상태였다. 카펠로 감독은 경기 후 “유감스럽다”고 한숨을 쉬었고, 홍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영리하게 좋은 플레이를 했다”고 웃었다.

홍 감독은 상대를 대놓고 반박하는 대신 뒤에서 차분하게 반격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상대를 칭찬하고 띄워 주면서 준비한 것을 계획대로 진행하는 홍 감독은 경기를 즐길 줄 아는 승부사다.

한국 대표팀의 공식 슬로건은 ‘즐겨라, 대한민국(Enjoy it, Reds)’이다. 국민들은 태극전사들에게 우승을 바라진 않는다. 당당하게 월드컵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한국 축구는 즐기는 만큼 강해진다.

포스두이구아수=김태현 기자 tae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