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는 유통업체가 물건을 턱없이 싸게 팔아도 제조사가 이를 막을 수 없었다. 당국은 가격은 유통업체가 스스로 결정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제조업체에는 대표적 규제였다. 그런데 정부가 무조건적인 규제는 맞지 않는다며 이 빗장을 풀면서 제조사의 가격 결정권이 확대됐다. 하지만 박근혜정부의 규제완화 기조를 맞추기 위한 무리한 제도 개선이라는 지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9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분야에서 15개 규제개혁 과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여기엔 최저재판매가격 유지행위 전면 금지를 푸는 내용이 담겨 있다. 최저재판매가격 유지행위란 상품의 제조사가 상품 가격의 최저 수준을 정해 그 이하로는 팔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행위다. 아웃도어 업체 노스페이스는 2012년 대리점들에 할인을 못하도록 강제했다가 공정위 제재를 받았지만 앞으로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 등의 이유로 제재를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영선 사무처장은 "최저재판매가격 유지행위가 비록 가격 경쟁을 저해할 수 있더라도 가격 이외 서비스 경쟁 등 유익한 경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조사가 유통업체 가격을 좌우하면 소비자가 싸게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될 수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무조건 할인판매 금지 행위를 허용하겠다는 게 아니라 다른 요인까지 고려해 위법성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규제개혁 과제에는 시장 지배적 기업이 제품 가격을 공급 비용보다 과도하게 비싸게 받으면 안 된다는 내용도 삭제됐다. 그간 당국은 독과점 기업은 가격과 생산량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남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품 공급 비용을 기준으로 가격 남용 여부를 판단했었다. 기술개발 등을 통해 원가를 낮추고도 제품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는 식이다.
공정위가 이런 입장을 바꾼 것은 수요와 공급의 변화에 따른 시장 기능에 의한 가격형성 메커니즘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제품 판단을 소비자에게 맡겨보자는 것이다. 공정위는 "공급 가격보다 훨씬 비싸더라도 수요가 많다는 것은 소비자들이 그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독과점 업체의 제품에 경쟁할 제품이 드문 현실에서 시장에만 맡기는 것은 공정경쟁 당국이 직무를 유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제조사의 제품가격 하한선 결정 허용에 대해 대형마트 등 유통업체들은 제조업체의 이익을 위한 법 개정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마트 측은 "대형마트의 가격경쟁을 제한하면 결국 소비자가 손해를 볼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판매가를 유통회사가 결정할 때는 대형마트들이 가격 차별화를 위해 이익을 최소화하면서 가격을 내리지만 제조업체가 판매가를 결정한다면 소비자가 손해를 볼 것이란 얘기다.
다른 대형마트 관계자는 "대형마트의 비가격 서비스는 이미 성숙해 있다"며 "이번 결정은 제조업체의 이익보장 측면이 강한 만큼 소비자에게는 불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통업체 관계자도 "시장 지배력이 큰 제조사들은 가격 하한선 결정 권한을 악용해 더 큰 이익을 추구하려 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세종=이용상 기자, 김혜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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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점 날개… 제조사에 가격결정권
입력 2014-06-20 0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