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vs 기억할 권리

입력 2014-06-19 03:02 수정 2014-06-19 20:16
1998년 3월 9일자 스페인 일간지 ‘라 방과르디아’ 지면 일부. 분홍색 박스 부분이 곤살레스의 주택 경매와 매각 공고에 관한 것이다.
최근 유럽에서 온라인상에서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효가 지났거나 부적절한 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 그러나 이 권리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잊혀질 권리’와 함께 ‘알 권리’, 즉 ‘기억할 권리’도 있다는 것이죠. 다소 낯선 개념인 ‘잊혀질 권리’. 사회 이슈를 친절한 목소리로, 그러나 깊이 있게 소개하는 슬로 뉴스가 유럽 재판부터 찬반 논란, 한국에서의 법제화 가능성 등을 조목조목 짚어봤습니다.

스페인 변호사 코스테하 곤살레스는 2010년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998년 빚 때문에 그의 집을 강제 경매한다는 일간지 기사가 아직도 검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년도 넘은 일이고, 지금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사안인데 그 뉴스가 검색되자 그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며 구글에 기사 삭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이 사건은 결국 유럽사법재판소까지 가게 됐지요. 재판소는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구글에 해당 기사로 연결되는 링크를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죠.

지난달 13일 있었던 이 판결은 온라인상에서의 개인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세기의 판결로 주목받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잊혀질 권리.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신에 대한 정보 가운데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은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한때는 사랑했지만 지금은 헤어진 예전 남자친구와의 사진, 별 생각 없이 올린 정치인이나 연예인에 대한 험담, 근무시간에 사적인 장소에 가서 올린 사진과 글.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지난날의 파편들, 한번쯤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잊혀질 권리에 대한 판결은 무조건 환영할 만한 것일까요. 문제점은 없을까요. 한국에서도 법제화돼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개인정보 보호 VS 표현의 자유 포기

판결에 대한 찬반은 팽팽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평가로 엇갈렸습니다.

우선 지지 입장입니다. “이번 판결은 개인정보 보호 관련 법 규정을 ‘디지털 석기시대’에서 ‘현대 컴퓨팅 세계’로 옮겨온 것으로 평가한다.”(비비안 레딩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법무담당 위원)

변호사 곤살레스가 구글 스페인에 글 삭제를 요청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이랬습니다. “우리는 광고 마케팅만 하는 조직이니 본사에 문의하라.” 그런데 법원은 구글 스페인에 당신이 책임지고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려준 것입니다. 그동안의 검색엔진의 논리를 파기한 셈이지요. 개인 차원에서 하기 힘든 삭제 요청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구글은 이 판결을 반영해 지난달 30일부터 자사 사이트에 ‘잘못됐거나 부적절하거나 오랜 시간이 흘러 유효하지 않게 된 개인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청하는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유럽에서만 접수 나흘 만에 4만1000건이 신청됐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온라인에서의 흔적 지우기 욕구가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반대하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적인 검열의 문이 열린 것이다. 정치인이나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미국 컴퓨터·커뮤니케이션산업협회)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건 결국 동료들이 적법하게 알고 있던 진실을 국가의 힘을 빌려 동료들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겠다는 시도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에서 법제화 가능성은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16, 17일 ‘2014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 콘퍼런스’를 개최했습니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내용을 짚어보고, 우리나라에서의 적용 가능성과 법제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국내 포털 사업자들은 이미 국내에는 잊혀질 권리가 적용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 보호에 관한 법률 제44조2의 ‘임시조치’가 그것입니다.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은 게시글에 대한 삭제 요청을 받으면 한 달 동안 해당 글을 온라인에서 가려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이 기간에 게시자가 글을 삭제한다고 합니다.

이 제도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습니다. 당사자 A가 어떤 글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손만 들면’ 처리해주게 돼 있는 것이죠. 만약 B가 A가 요구한 삭제가 정당하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이 사안은 방송통신심의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A가 공인이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공공의 알 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해당 게시글이 명백하게 허위로 소명되지 않는 한 처리를 제한합니다. 공인 A는 이 경우 인터넷자율정책기구에 심의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곤살레스가 국내 포털 사업자에게 똑같은 요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국내에선 법원까지 갈 것도 없이 ‘임시조치’에 의해 삭제됐을 겁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2012년 임시조치된 게시물은 23만건, 2013년은 8월까지 이미 22만건에 달했습니다.

정치권에선 지난해 4월 이노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안 발의 후 깜깜무소식이었는데 이번 판결로 법제화가 가능해질까요?

잊혀질 권리에 신중한 접근 필요

잊혀질 권리가 있다면 기억할 권리, 알 권리도 있습니다.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의 반대 입장에 있는 건 구글이 아니라 다른 구글 이용자라는 겁니다.

잊혀질 권리의 범위와 처리 방법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공공의 이익이 우선시되어야 할 사안은 어디까지일까요? 정치인의 병역 비리는 공인이라서 알 권리에 해당되고 연예인은 법적으로 공인이 아니라서 상관없는 것일까요?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잊혀져도 되는 걸까요? 기준이 불명확합니다.

한국인터넷진흥원 백수원 박사의 제안 하나가 눈에 띕니다. 잊혀질 권리를 제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선 원천적으로 사생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자료에 관해서는 자동적으로 별도의 보관함을 통해 검색되도록 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이죠.

사용자가 글이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때 타이머로 특정 시점을 설정해놓으면 해당 시점이 될 때 글이나 사진이 시한폭탄처럼 소멸하며, 자기 계정뿐 아니라 다른 계정으로 퍼진 자료도 함께 없어지게 되는 것이죠.

정찬모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잊혀질 권리의 국내 도입은 신중해야 하며 일단은 현행 정보통신망법상 사생활 침해 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의 운용을 재점검하는 수준에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습니다.

잊혀질 권리 판결에 대해 가장 반색하는 이는 정치인이라는 얘기가 들립니다. 지방선거를 앞둔 후보자 A가 예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담긴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모두 삭제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도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없애도록 세심한 법조항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