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빗장 열고 “오케스트라 듭시오”

입력 2014-06-19 02:53
문화체육관광부 주최의 ‘배움여행 여유’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지난 13일 저녁에 광주 월봉서원에서 방성호 음악감독이 지휘하는 웨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여유로운 음악회’를 관람하고 있다.
베이스 나윤규와 소프라노 김한나가 '여유로운 음악회'에서 오솔레미오를 열창하고 있다.
선비복장 관광객들이 전주동헌서 향음주례를 체험하고 있다.
향사례에 참가한 관광객이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다.
웨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광주 월봉서원에 울려 퍼진다. 조선 중기 대학자인 고봉 기대승 선생의 후학들이 사서오경을 읽던 곳이다. 베이스 나윤규의 중저음에 놀란 월봉서원 대숲이 가늘게 떨고, 소프라노 김한나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담장을 넘어 너브실 마을 돌담길로 산책을 떠난다. 지휘자 방성호의 혼을 실은 지휘봉이 허공에서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춘다. 이윽고 화답이라도 하듯 월봉서원 뒷산에서 보름달이 둥실 솟는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굳게 닫혔던 빗장을 열어젖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발걸음을 유혹하는 향교와 서원의 체험 프로그램은 고리타분한 느낌의 사서오경이 아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나날이 쇠락해가던 향교와 서원의 문을 활짝 열게 한 주인공은 종갓집 태교와 선비의 밥상, 오케스트라 공연 등으로 구성된 ‘배움여행 여유(旅儒)’이다.

배움여행 여유는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삶의 지혜를 배우는 현대적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학회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단과 함께 전국 곳곳에 산재한 900여개의 향교 및 서원의 체험 프로그램을 공통 브랜드로 묶고 교육과 여행을 접목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해 보급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공교육 기관인 향교는 전국에 234곳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전주향교는 역사가 650여년으로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영화 ‘성균관 스캔들’의 촬영 현장인 전주향교에서 가장 인기 높은 프로그램은 사상견례(士相見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 그리고 향사례(鄕射禮)이다.

전주판관 집무실이었던 전주동헌에서 열리는 사상견례는 선비들이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 예법으로 겸손과 배려를 통해 벗을 사귀는 선비의 자세를 배우는 시간이다. 도포와 유건으로 의관을 갖춘 참가자들이 주인과 손님으로 역할을 분담한 후 조선시대로 돌아가 나누는 첫 인사는 현대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예법이다.

이어 진행되는 향음주례는 선비들이 술 한 잔 마실 때도 얼마나 예의범절을 중요시했는지를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다. 거듭 청하고 거듭 사양하는 고청고사(苦請苦辭)를 통해 소통과 교화의 연회가 끝나기까지 무려 50번이나 절을 한다. 향사례는 연회가 끝난 후 편을 갈라 활쏘기를 하던 의식.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키지 못해도 흥분하지 않는 선비의 덕목을 경험하는 소중한 체험이다.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영조시대에 1000개가 넘을 정도로 흥했지만 붕당과 비리의 온상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47개 서원만 남겨두고 모두 철폐했다. 이후 철폐됐던 서원이 복원돼 현재 전국에는 700개의 서원이 전해오고 있지만 고택과 달리 일반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대부분 문을 굳게 닫고 있는 현실이다.

전국의 곳곳에 산재한 서원 중 가장 활발하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은 광주 광산구에 위치한 월봉서원이다. 월봉서원은 조선시대 대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 선생의 학덕이 서려있는 곳이다. 고봉은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퇴계 이황과 13년 동안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철학 논쟁으로 평가받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전개한 인물이다.

당시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두 살의 신출내기 선비였고, 퇴계는 쉰여덟 살의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 논쟁을 뛰어넘어 정치와 처세, 나가고 물러남의 이야기 등을 편지를 통해 주고받았다. 고봉은 46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퇴계의 주리설(主理說)과 색다른 주기설(主氣說)을 정립해 주목받은 대학자이다.

너브실로 불리는 광곡마을은 영산강 지류인 황룡강과 호남선 철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담한 마을이다. 월봉서원은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주강당인 빙월당(氷月堂)을 비롯해 숭덕사, 명성재, 존성재, 장판각 등으로 이루어진 월봉서원은 문화재청의 ‘2014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활성화 사업’으로 일반인들에게 한발 더 가까워졌다. 특히 서원 옆에 교육체험관인 강수당과 숙박시설인 이안당이 들어서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있다.

월봉서원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조선시대 선비의 일상을 체험하는 ‘선비의 하루’, 고품격 인문학 교류 마당인 ‘살롱 드 월봉’, 삶의 자세와 진로를 탐색하는 ‘청소년 이기(理氣) 진로 교실’, 요리를 통해 철학을 만나는 ‘철학자의 부엌’, 예술과 놀이로 내 안의 철학을 깨우는 ‘꼬마철학자상상학교’ 등이다. 이 프로그램들의 특징은 지자체인 광산구청의 주도로 지역사회 문화단체와 문중이 참여한다는 점이다.

배움여행 여유의 특징은 향교 및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깜짝 프로그램에 있다. 지난 13일 저녁에 월봉서원 빙월당에서 열린 웨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음악감독 방성호)의 ‘여유(旅儒)로운 음악회’가 대표적이다. 빙월당의 대청마루가 좁아 이날 연주회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등 연주자 9명과 베이스 나윤규, 소프라노 김한나 등 성악가 2명이 출연한 미니 오케스트라였다. 청중도 지역주민 등 50여명에 불과했지만 어스름이 내리는 서원은 감동의 무대였다.

유교문화활성화지원사업단장인 한범수 경기대 교수는 “향교와 서원이 그동안 너무 갇혀 있었다”며 “향교와 서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주·광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