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떠나는 알렌
1905년 6월 9일. 알렌은 한국에 입국할 때 거쳤던 인천항에서 미국 선박 ‘오하이오’호를 타고 한국을 떠난다. 항구에서 멀리 보이는 시골집들이 평화롭게 보였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알렌의 나이는 26세였다. 21년을 머물고 다시 미국으로 떠날 때의 나이는 47세. 당시로서는 초로(初老)였다.
알렌은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한국 땅을 한참 바라보다가 소중하게 간직했던 ‘태극대수장’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1904년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것으로 왕족 이외에는 받은 사람이 없다는 영광의 훈장이었다.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던 한국이던가. ‘나는 이 나라에서 보낸 생애를 기뻐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훈장을 받고 나서 알렌이 고종에게 보낸 감사의 글이다. 알렌은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무릎에 파묻은 채 한참을 울었다.
알렌을 보내는 비운의 고종
알렌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은 것은 1905년 6월 2일이었지만, 해임 날짜는 그보다 앞선 3월 29일이었다. 후임인 모간의 부임 날짜는 6월 22일이었다. 한 달 뒤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다. 미국 정부가 일제의 한국 통치를 양해한다는 비밀각서다. 그해 11월 17일에는 굴욕의 을사늑약을 맺는다.
구한말 비극의 회오리가 부는 한복판에서 알렌은 사라져 간 것이다. 미국은 을사늑약 체결 후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 주재 미국공사관의 철수를 한국 조정에 통보한다. 그렇게 서두른 이유가 무엇일까.
떠나기 전 알렌은 마지막으로 고종 임금을 찾아간다. 고종은 알렌과는 20여년 지기(知己) 동료요, 막역한 전우였다. 혈육인들 이보다 더 가까웠으랴. 그 어느 때보다도 알렌의 도움이 필요한 때였기에 고종은 알렌의 소매를 차마 놓지 못했다. 그러나 알렌은 이미 머리털이 깎인 삼손과 같이 힘이 없었다. 뭐라 고별인사를 했을까. 고종의 눈가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알렌의 해임은 너무 가혹해
알렌의 해임은 너무나 가혹했다. 알렌은 해임되기 얼마 전 미국에 가서 루스벨트 대통령과 다퉜다고 한다. 서로 고성이 오갈 정도로 언쟁을 벌였다. 알렌은 미국 정부의 친일정책을 비판했다. 저 변두리의 작은 나라에 가 있는 공사가 대통령에게 덤비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알렌은 한국을 위해 그렇게 했다. 알렌은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부하 직원인 모간에게서 해임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한국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눈물을 흘린 대신들도 있었다. 한국 주재 외국 공사관의 외교관들도 미국 정부가 정신이 나갔다며 비판했다.
한국 실업인들과 타국 외교관들, 미국 선교사들, 한국 조정이 혼연일체가 돼 워싱턴에 알렌의 해임을 취소하라는 탄원서를 타전한다. 그러나 끝내 회답이 없었다.
알렌은 우리의 참 벗
우리는 그가 최후까지 일제의 한국침략을 고발하고 제지하고 정죄한 외로운 투사였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고매한 품격과 기독교신앙을 가진 알렌은 일본의 간악을 방치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렌의 몰락을 가져온 것이다. 일본과 미국 정부가 손잡고 알렌을 몰아낸 것이다. 방치된 한국, 외로운 한국 근대사에 이런 막역한 친구가 어디 있었던가.
알렌의 헌신 덕분에 우리나라는 미국에 대해 ‘어렵고 힘들 때 힘이 되는 든든한 내 편’이라는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친일정책을 내세운 또 다른 미국이 있었다. 한·미·일 삼국의 이런 구도는 아직도 남아 있다.
옛 동료들의 위로
알렌과 앙숙이었던 미국 선교사들 전부가 비통과 아쉬움으로 알렌의 해임을 아파하며 서로 손목을 잡고 놓지 못했다. 알렌은 그것이 제일 고마웠다. 알렌은 선교사들에게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일하는 것보다 고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부럽다”는 말을 남긴다. 그는 그런 감격을 갖고 떠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알렌은 하나님을 위해, 한국을 위해 몸 바치고 살다가 떠난 우리 근대사의 기념비적인 존재로 길이 남을 것이다.
말년의 알렌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 오하이오의 토레도에서 병원을 개업한다. 또 알렌은 한국선교를 하며 기록해두었던 문서를 모아둔 상자 33개를 뉴욕시립도서관에 기증한다.
72세가 되던 해, 당뇨병으로 계속 고생하던 알렌은 두 다리를 절단하고 만다. 병이 너무 심해 죽음을 안식으로 기다릴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1932년 12월 11일 그가 74세 되던 해, 토레도시는 한국의 오랜 친구요 근대 한국의 개척자인 알렌의 부음 소식을 듣는다. 장례식 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그렇게 갔다. 그의 사망소식을 들은 서울의 선교사들은 고별사를 남긴다. “알렌 박사님. 한국 어디에서든지 누구든지 그렇게 오래도록 불려지던 당신의 이름이 잊혀질 날은 없을 것입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20·끝) 알렌 한국을 떠나다
입력 2014-06-17 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