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권하는 CEO, 책 읽는 직장-애경산업] 사장과 通하는 ‘독서문화 전사’ 파워

입력 2014-06-16 02:02
애경산업의 ‘독서문화 전사’ 주니어보드 멤버들이 1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의장인 유경환 과장(왼쪽 두 번째) 주재 하에 사내 도서관 설립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이 사람들, 힘이 세다. 과장 이하가 모여 내놓은 제안이 ‘보고 사다리’를 거치지 않고 사장에게 직보된다. 애경산업의 ‘주니어보드’ 얘기다. 입사 4∼9년 차 사원에서 과장급 10명으로 구성됐다. 영업 마케팅 경영지원 연구소 공장 등 각 부문에서 스카우트된 이른바 에이스들. 이들에겐 임원이 다는 금배지도 주어진다.

지난 13일 서울 여의도공원. 힘센 이들이 만났다. 서울 구로구 본사 사무실이 아니라 아예 공원으로 출근해 자유롭게 종일 토론을 벌인다. 본사뿐 아니라 대전과 충남 청양 등 지방의 연구소와 공장에서도 합류했다.

“본사 지하 접견실 7평 남짓한 공간을 도서관으로 활용하자는 우리 제안에 사장님 결재가 떨어졌습니다. 구글의 창의적 도서관처럼 한번 멋지게 만들어 보지요. 디자인은 디자인센터 신애라 대리가 맡아줬으면 해요.”(의장·유경환 경영지원부문 과장·36)

“활성화하려면 이벤트를 마련하는 게 좋은데…. 음, 처음 몇 달간 책꽂이 사이에 상품권을 숨겨두는 보물찾기를 하면 어떨까요?”(이주현 화장품 부문 대리·31)

“책을 1000권쯤 갖춰야 해요. 좋은 생각 없나요?”(유 과장)

“신간은 구매해야 되지만 나머지는 기증을 받는 게 좋겠어요. 기증자 이름도 표시해 주고.”(김진철 신채널 부문 사원·30)

주제인 사내도서관 설립 및 운영 방안을 놓고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애경산업은 독서경영만큼은 한국, 아니 세계 1등 기업이 되고자 한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독서경영을 내걸고 임직원에게 책을 권하고 있다. 책값에만 연 1억원을 쓴다. 애경그룹 생활항공부문 안용찬 부회장이 주창했다. 장영신 회장의 사위로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안 부회장은 책 읽기를 밥 먹듯이 하는 독서광이다. 미국 와튼스쿨 MBA 출신인 그는 책을 통해 계열사 사장 및 임직원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애경산업 고광현 사장에게도 전염됐다. 실적 때문에 주눅 든 임원에게 말없이 ‘답을 내는 조직’(쌤앤파커스) 같은 책 한 권을 내미는 식이다.

CEO가 책을 권한다고 책 읽는 직장문화가 정착되는 건 아니다. 애경의 독서경영 개척의 중심에 이들 주니어보드가 있다. 2009년 ‘청년 중역 회의’ 개념으로 출발했다. 그러다 3년 전부터 이들에게 독서문화 확산의 미션이 떨어졌다. 이들 ‘독서문화 전사’들은 월 1회 만나 독서경영 정착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논의한다. 회사가 아닌 카페 등에서 만나 온전히 그 문제에만 골몰케 하는 건 그런 일의 무게 때문이다. 성과는 적지 않다. 연 2회 저자 초청 특강, 올해의 필독서 선정, 온라인 독서 게시판 운영, 사내 백일장 시행…. 작년부터는 1년에 한 차례 계열사인 제주항공과 연계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제주항공과 함께 연 ‘북킹 페스티벌(Booking Festival)’의 아이디어는 발랄하다. 하이라이트는 TV 프로 ‘도전! 골든벨’을 벤치마킹한 ‘독서 골든벨’이다. 생각해 보라. 서울 구로구민회관에 양사 임직원 수백명이 모여 O, X 표시를 따라 뭉치고 흩어진다. 이런 대규모 행사는 이때가 처음이다.

주니어보드가 가장 신경 쓰는 건 다독과 함께 제대로 읽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내 백일장을 시행한다. 일단 독서 감상문을 쓰는 참가자에겐 포인트를 준다. 회사에서 주는 연간 도서구입비 16만원에 이들 포인트를 더해 책을 더 살 수 있다. 우수 감상문에는 포상도 있다. 백일장 참여율은 해마다 높아진다. 또 매월 10, 20, 30일은 도서추천의 날이다. 평소 주고 싶었던 동료에게 정감 있는 메모와 함께 책을 선물하는 독서 릴레이가 펼쳐진다. 책이 동료애와 소통의 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청년 중역인 이들에게 가장 무거운 과제는 그해의 필독서 12권을 선정하는 일이다. 부회장과 사장이 각각 추천한 책 3권에 이들이 고른 6권이 더해진다. ‘깨끗함, 신뢰, 혁신’의 3대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 책을 고르는 일이니 ‘애경인의 지적 DNA’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프레임’ ‘리딩으로 리드하라’ 등이 올해 이들의 엄선을 통과했다.

효과는 어떨까. 유 의장은 “독서 게시판에 ‘책에 이런 얘기가 있던데 우리 회사에 적용해보는 건 어떨까’라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걸 보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애경산업의 독서문화는 슬슬 계열사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제주항공이 주니어보드를 벤치마킹한 조직을 올해 론칭할 계획이다. 네오팜, 에이텍 등 다른 계열사에서도 관심을 표명한다.

애경산업 홍보실 양성진 상무는 “경영자와 직원이 서로 같은 책을 읽고 기업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 이게 우리 회사 독서경영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손영옥 문화부장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