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점점이 홀로 살던 노인들 절절한 ‘절친’ 생기다… 노인이 노인 돌보는 ‘밀알공동체’

입력 2014-06-14 02:45
'밀알공동체' 모임 할머니들이 지난 12일 서울 신길동 유태열 할머니 집에서 멸치국수를 나눠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지난 12일 오후 15평 남짓한 서울 신길동의 조그만 다세대주택 2층에서 이색 파티가 열렸다.

주 메뉴는 ‘멸치국수’, 참석자의 평균 연령은 73세, 대부분 혼자 사는 ‘싱글’들의 파티였다. 파티 주최자는 유태열(76) 할머니다. 유 할머니가 혼자 사는 조용한 집안은 오후 2시쯤 7명의 파티 참가자가 모여들면서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버선발로 나서 이들을 맞은 유 할머니는 국수 삶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좋은 국수가 생겨서 친구들을 초대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서울 영등포구의 ‘함께 살이’ 사업 중 ‘밀알공동체’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밀알공동체’는 같은 지역에서 고립된 섬처럼 혼자 살아가는 노인들을 소개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모임이다. 유 할머니는 지난해 이 공동체에 가입했다.

유 할머니는 한때 강남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아들이 사업 실패로 재산을 탕진하고 잠적하면서 혼자가 됐다. 강남의 집은 전세로, 이어 월세로 바뀌었고 유 할머니는 점점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간간이 찾아오던 다른 가족과 친구들의 발길은 끊긴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유 할머니는 “생활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떨어지다 보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좌절에 빠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던 건 영등포 노인종합복지관의 조향임 생활관리사였다. 처음엔 문도 열어주지 않고 무시했지만 계속된 그의 방문에 할머니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조 생활관리사는 유 할머니에게 우울증 예방 프로그램을 받을 것을 권유하고 밀알공동체를 소개했다.

그가 밀알공동체에서 처음 만난 친구는 채소 장수 A씨(79·여)와 말기암 환자 B씨(76·여)였다. 사회와 담을 쌓은 채 홀로 살아가던 이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또 다른 가족이 됐다. 유 할머니는 A씨가 장사를 하는 신길역을 자주 찾았다. 좌판에 앉아 집에서 타온 냉커피를 마시거나 같이 콩을 까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B씨와는 같이 장을 보러 가고 함께 밥을 챙겨 먹었다. 암에 걸린 데다 허리마저 굽어 이동이 불편한 B씨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유 할머니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 유 할머니는 “상처는 마음의 문을 잠그는 단단한 자물쇠가 된다. 외부와 단절된 B씨를 보면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항상 유 할머니가 먼저 전화를 걸었던 것과 달리 어느 날 B씨가 먼저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집에 와서 떡 같이 먹자.” 이날 부로 이들은 살아온 인생을 나누는 ‘절친(절친한 친구)’이 됐다. B씨는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얘기를 전해주던 유 할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조 생활관리사는 “B할머니는 암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유 할머니 얘기에는 항상 반응을 했다. 유 할머니는 B할머니의 인생에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유 할머니의 주방 찬장에는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이라곤 생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식기구들이 있었다. 15년 전 가족과 단절된 채 혼자 살 때부터 갖고 있던 ‘짐’이었다. 그러나 짐은 오랜만에 찬장에서 나와 먹음직스러운 국수를 담은 채 친구들 앞에 놓여졌다. 유 할머니는 “혼자 밥 먹을 땐 필요가 없었지. 친구들이 생기면서 짐이 빛을 보게 된 거지”라며 멋쩍게 웃어넘겼다.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는 65세 이상 주민이 613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2.2%를 차지한다. 독거노인도 125만명에 달한다. 조 생활관리사는 “동네를 들여다보면 이런 세계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투명인간처럼 존재하는 노인들이 많다. 눈을 돌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사각지대의 고립된 섬 같다”며 “섬에서 나와 저들끼리 관계를 만들어 가는 모습에 진짜 한 동네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영등포구는 사회 활동이 가능한 60, 70대 독거노인 134명을 ‘밀알도우미’로 선발해 17개 동(여의도동 제외)에서 19개 팀을 운영하고 있다.

글·사진=황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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