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의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가 수도 바그다드 턱밑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이라크 정부의 공습 지원요청을 거부했던 미국이 군사 개입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을 가급적 줄이겠다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공언’이 보름 만에 수정된 것이다. “전략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그의 ‘신(新) 외교독트린’이 시험대에 올랐다.
◇오바마 외교 또 곤혹=오바마 대통령이 비판을 감수해가며 이라크 군사 개입으로 방향을 튼 데는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만 해도 내부 분쟁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던 오바마 행정부는 ISIL이 순식간에 이라크 영토의 3분의 1가량을 점령하자 ‘모든 옵션’을 고려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이라크에서 미국의 안보이익이 위협받을 때는 군사행동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군사 개입에 대한 비난을 예상한 듯 ‘미국의 안보이익이 위협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신 외교독트린’은 미국의 안보이익이 직접적으로 침해받을 경우에만 군사 개입을 시도한다는 게 골자다.
그는 ‘미국이 이라크 정부를 돕기 위해 무인기(드론) 공습이나 다른 행동을 취할 것이냐’는 물음에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며 “국가안보팀이 단기적이고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포함해 모든 옵션을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 정치권과 언론은 오바마 행정부가 이라크 사태에 중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공화당 등 보수파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소극적 개입주의가 빚어낸 ‘외교 실정(失政)’이라고 각을 세우고 있다. 존 매케인(애리조나) 상원의원은 “모든 미군을 이라크에서 철수시킨 것은 실수였다”며 행정부의 국가안보팀 전원 경질을 촉구했다.
존 베이너(오하이오) 하원의장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도대체 낮잠을 자는 거냐”고 비아냥대자 워싱턴포스트(WP)의 보수적 칼럼니스트인 제니퍼 루빈은 한발 더 나아가 “낮잠 자는 게 아니라 항복한 것”이라고 비꼬았다.
◇현지 언론, “바그다드 함락은 시간문제”=ISIL은 이날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90㎞ 떨어진 둘루이야 마을까지 진격했다. 10일 이라크 제2도시 모술, 이튿날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까지 수중에 넣은 데 이어 바그다드 코앞까지 온 것이다. 아부 무함마드 알아드나니 ISIL 대변인은 “우리는 바그다드까지 진격해 해묵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며 “시아파 성지인 남부의 카르발라와 나자프도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시아파인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가 의회에 비상사태 선포를 요청했으나 325명 재적의원 중 128명이 참석하는 데 그쳐 정족수 부족으로 부결됐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시아파 민병대와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바그다드 함락은 시간문제라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ISIL이 다른 지역 반군과 손잡으며 터키, 시리아 등 주변국에도 공포가 커지고 있다. 터키 언론은 이라크 모술 주재 총영사 등 자국민 80명이 ISIL에 납치됐다고 보도했다. ISIL의 득세로 터키 정부와 쿠르드족 간 갈등도 악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ISIL이 시리아 동부와 이라크 서부에 놓인 국경을 허물 정도로 세를 불림에 따라 시리아 내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정건희 기자 bwbae@kmib.co.kr
이라크 내전 여파… ‘오바마 新 외교독트린’ 시험대
입력 2014-06-14 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