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기온이 영하를 살짝 밑돌았던 지난 4월 15일 정오. 헬싱키 외곽도시 에스포(Espoo)에 위치한 중독치료센터 ‘에이 클리닉’ 현관의 초인종이 길게 울렸다. 잠금장치가 풀리자 어깨까지 오는 붉은 더벅머리의 청년이 건들거리며 한쪽 어깨로 문을 밀고 들어왔다. 이 청년은 익숙한 듯 로비의 탁자에 가방을 던져두고 한쪽 벽의 배식구에서 마카로니와 오믈렛을 받아 왔다. 에이 클리닉에서 1년째 약물중독 치료를 받고 있는 티뮤(가명·23)다.
◇동네 마트 가듯 들를 수 있는 치료기관=그는 청소년 때 시작된 알코올 중독이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 경우다. 4년 전 집을 나와 혼자 살면서 외로움을 잊고자 술을 홀짝거린 게 중독의 시작이었다.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더 강력한 것’을 찾던 티뮤는 뒷골목에서 파는 불법 약물에까지 손을 댔다.
티뮤가 매일 점심시간마다 센터에 들러 점심을 먹는 것은 하나의 치료 과정이다. 당초 정해진 치료 일정은 2∼3일 간격으로 소변 검사와 상담을 받는 것이지만 센터는 식비를 댈 능력이 없는 티뮤를 배려해 무료 식사를 지원한다. 에이 클리닉에서 심리 상담을 맡고 있는 민나 율로넨(사진) 박사는 “혼자 힘으로 먹고살기 어려운 고객의 생활을 도와 다시 중독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치료의 한 방법”이라며 “매일 점심시간마다 자연스럽게 고객을 만남으로써 호전 여부도 진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율로넨 박사는 줄곧 ‘환자(Patient)’ 대신 ‘고객(Customer)’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는 “중독자들은 내 고객이고, 나는 고객에게 심리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얼핏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중독자와 상담사 간 벽이 허물어지는 대목이다. 티뮤는 “센터 직원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평범한 사람처럼 대해준다”며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매일 점심을 먹으러 올 수 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에이 클리닉은 핀란드 전역에 20여개 지점을 두고 있는 중독치료 전문시설이다. 민간 재단이 운영하지만 운영비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온다. 상담사와 약사, 의사가 24시간 상주하며 중독자들을 돕는다. 우리나라와 달리 치료비는 전부 무료다. 국민 세금 비중이 높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가장 큰 특징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 누구나 동네 슈퍼 가듯 센터를 오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오픈 케어(Open Care)’라고 불리는 이 서비스는 따로 예약하지 않아도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아무런 조건도 없다. 치료 과정 중간에 이탈한 중독자라도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
매일 오전이면 중독자들이 심리 상담 또는 치료약을 받기 위해 오픈 케어 서비스의 문을 두드린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차분한 자연광 조명 아래 놓인 원색의 가구들은 흡사 분위기 좋은 찻집을 떠올리게 했다. 곳곳에 놓인 그림과 나무, 장식품들이 활기찬 분위기를 더했다. 이곳에서 환자들은 차도 마시고 신문도 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여느 가정집의 거실 같은 풍경이었다.
율로넨 박사는 “센터의 역할은 중독자를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중독자를 찾아내는 것”이라며 “내 집처럼 안정적인 분위기를 제공해 중독자들이 부담감 없이 센터를 찾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가장 효과적인 중독 치료는 ‘장기적 관리’=에이 클리닉에서는 오픈 케어의 기초 상담을 거쳐 중독자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판단되면 센터에 입소해 2주간 치료받는 ‘인 케어(In Care)’ 프로그램으로 안내한다. 상담, 약물, 침술, 음악·미술치료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인 케어 프로그램에서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을 경우 환자는 다른 지역의 장기재활센터로 연계한다. 애써 찾아낸 중독자를 치료 중간 단계에서 놓치지 않으려면 장기적 관리는 필수다.
센터를 찾아 치료받는 것은 완전히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일단 입소하면 엄격한 규정이 적용된다. 휴대전화 사용은 물론이고 면회도 금지된다. 중독자가 지인을 통해 술이나 약물을 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중독자에게 아이가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돌볼 사람이 없는 아이는 지자체의 보호 기관으로 보내진다.
약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소변 검사를 실시한다. 일부 약물 중독자들이 약을 제때 먹지 않고 모아뒀다가 한 번에 털어 넣기 때문이다.
장기 치료의 핵심은 단순한 중독 증세 치료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기반까지 마련해주는 ‘원 스톱’ 시스템이다. 인 케어 등 장기 프로그램에서 어느 정도 호전됐다고 판단되는 중독자는 오픈 케어 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본격적인 재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센터를 찾는 중독자 대부분이 오갈 데 없는 장기 실업자다. 이 때문에 센터에서는 이들의 구직 활동과 주거를 지원하는 업무 담당자를 따로 두고 있다. 핀란드에 각종 중독자는 많아도 홈리스가 없는 이유다.
더 나아가 가족이 있는 중독자들은 가족까지 치유 대상이다. 센터에서는 중독자 자녀나 배우자를 둔 사람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중독자들의 심리적 갈등이 가족에게 전가되는 걸 막는다는 취지다.
핀란드의 중독 치료는 환자 전체의 인생을 아우르며 다분히 생활밀착형으로 진행된다. 율로넨 박사는 “세금을 많이 내는 국민들에게 응당 제공돼야 할 서비스일 뿐”이라고 말했다.
헬싱키=글·사진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중독국가’ 대한민국] (⑤·끝) 중독 치료 선진국, 핀란드에서는
입력 2014-06-16 02:50 수정 2014-06-16 1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