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최된 모 기독교 학술대회의 설교학 논문 발표 시간에 한 참여자가 발표자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청년들에게 설교하기가 막막하다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 그 자리에서는 질문자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주장과 그런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맡은 바 본연의 설교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주장 등 상반된 입장이 대두돼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이처럼 세월호의 충격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깊숙이 미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필자도 ‘나는 어느 쪽인가’ ‘나라면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그러면서 세월호 사건을 처음 접하면서 경험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텔레비전 화면에 세월호가 옆으로 기울기 시작해 얼마 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져 바닷물 속에 잠겨가는 모습과 실종자가 300여명이라는 자막을 동시에 보면서 ‘아니 저럴 수가’라는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10여명도 아닌 300여명이란 숫자와 그들 중 대부분이 고등학생들이라는 뉴스에 ‘아니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며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날 저녁부터 대한민국의 모든 뉴스 매체들은 세월호와 그 유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을 전 국민에게 낱낱이 보도했다. 유가족뿐 아니라 이를 보는 온 국민의 마음에 충격과 비통, 우울의 감정이 전파됐다. 아이를 잃은 부모가 울부짖는 모습과 그러다 쓰러져 병원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는 필자도 내 가까운 이들의 일처럼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구름이 많고 바람이 불긴 했지만 날씨가 그리 나쁘지 않은데도 일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뉴스와 기사를 꼼꼼히 챙겨봤다. 선박구입, 선박안전 점검과 운항에 관련된 기관들 중에 한 기관만이라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됐으면 어땠을까’라는 안타까움을 갖게 됐다. 이 때 누군가를 꼬집고 그 사람 탓하고 삿대질을 할 수 있었다면 마음이 편했을지 모른다. 우리 주변에 제2의 세월호 가능성이 널려 있다는 것과 나도 그런 가능성에 일부라도 기여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그러면서 들었던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때일수록’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감이었다. 그래서 유족들에게 주의 은총이 임하길 기도한다며 주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되뇌면서 침묵하게 됐다. 두 손을 펴고 주의 은총과 지혜를 주시길 원하는 자세로 손바닥을 위로 펴서 무릎 위에 놓고서 말이다. 이런 자세로 주님의 은총과 지혜를 구하고 기다리다 기도가 끝나곤 했다.
기도의 시간은 계속 됐다. 침묵 기도 시간이 누적되면서 먹먹한 가슴이 조금씩 잦아 들어감을 느꼈다. 이 가운데 다가왔던 생각은 소를 잃었더라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책임자를 규탄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건의 원인과 과정을 철저하게 조사해 법을 어긴 이들은 적절한 처분을 받게 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각자 자신의 처소에서 맡고 있는 일을 예전보다 더 기본에 충실하게 해가는 것이다.
권명수 교수 (한신대 목회상담)
[시온의 소리-권명수] 세월호 사건 후의 기도
입력 2014-06-13 0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