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준동] ‘오대영’과 ‘사대영’

입력 2014-06-13 02:39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대한축구협회 국제국에 주문을 하나 한다. 평가전 상대로 강팀을 알아봐 달라는 것이었다. 협회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자칫 대패했을 경우 월드컵을 그르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월드컵 개막 1년 전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컨페더레이션스컵. 히딩크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우승팀인 프랑스에 0대 5로 대패하고 만다. 3개월 후 열린 강호 체코와의 평가전에서도 같은 스코어로 참패하자 히딩크 감독에게는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스코어에 연연하지 않고 패배 속에서 ‘승리의 DNA’를 찾고자 했다. 결국 히딩크의 이런 집념은 4강 신화라는 기적으로 이어졌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허정무 감독도 잇따른 평가전에서 졸전을 거듭했다. 골 결정력 부족은 여전했고, 수비는 ‘뻥뻥’ 뚫렸다. 허 감독의 이름에 빗대 ‘허무 축구’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도 본선 무대에서는 달랐다. 한국 축구 사상 원정 월드컵 첫 16강 진출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비록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아깝게 1대 2로 졌지만 허 감독은 일약 히딩크 감독 반열로 올라섰다.

13일 오전(한국시간) 개막한 브라질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홍명보 감독도 최근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하나 얻었다. 바로 ‘사대영’이다. 지난 1월 30일 멕시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 4로 참패한데 이어 지난 10일 가나와의 평가전에서도 같은 스코어로 대패한 뒤 붙여진 오명이다. ‘영원한 리베로’라는 애칭으로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홍 감독으로서는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 같다.

최근 한국팀의 성적을 보고 실망하는 축구팬이 많다. 그래서 성적보다는 월드컵 자체를 즐기자는 말도 들리고, 애국적인 기대도 접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낙담하기엔 이르다. 2000년대 들어 열린 세 차례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은 대회 개막을 앞두고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막상 본선 무대에서는 전혀 달랐다. 한일월드컵이 그랬고 4년 전 남아공월드컵도 그랬다. 정신력이 남달랐다는 얘기다. ‘오대영’처럼 ‘사대영’이라는 비판도 보약이 될 수 있다. 사대영이라는 보약이 어떤 결과를 낼지는 18일 오전 7시 러시아와의 첫판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대영’이 4강 신화로 이어졌듯 그로부터 12년 후의 ‘사대영’이 어떤 신화를 만들지 차분하게 지켜보자.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