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북의 한 정신과 병원. 의사에게 “이런저런 일들로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고 말하니 항불안제인 디아제팜과 수면유도제 등을 처방해줬다. 병원에 도착해 상담 후 약을 탈 때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실제 불면 증세는 전혀 없었지만 약을 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정부 지정 마약류인 디아제팜을 구하는 일은 이렇게 쉬웠다.
우울증 등 정신건강에 대한 대중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자발적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는 사람도 늘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을 고치려다 예기치 못한 약물 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덩달아 많아졌다. 마약류로 분류되는 향정신성의약품의 중독성 때문이다.
이런 약품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복용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 중독성이 강한 만큼 의사들은 서서히 복용량을 줄여 의존을 막는 식으로 처방한다. 그러나 처방받은 약물을 모아뒀다 한꺼번에 복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명 ‘소프트 드럭(Soft Drug)’으로 불리는 이런 약물은 사실상 중독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어둠의 경로’로 유통되는 향정신성의약품들=9일 인터넷 검색창에 ‘로라제팜’을 입력하니 ‘로라제팜 구매’가 연관검색어로 떴다. 항불안제인 로라제팜의 또 다른 이름 ‘아티반’을 검색해도 ‘아티반 구입’이 연관검색어로 뜨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약품은 마약류로 지정돼 있어 처방전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비정상적 경로로 약품 구입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로라제팜을 사겠다’는 내용의 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불법으로 마약류 약품을 취급하는 판매자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각종 은어를 사용해 판매글을 올려놨다. 뿐만 아니라 중추신경계를 자극해 단기적 각성 상태로 만들어주는 일부 향정신성의약품은 한때 ‘공부 잘하는 약’으로 불리며 수험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식욕억제 부작용이 있는 일부 약품은 ‘살 빼는 약’으로 둔갑해 암암리에 판매된다.
실제로 지난해 11월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향정신성의약품 불법 판매 조직과 투약자 등 92명이 무더기로 경찰에 붙잡혔다. 10여명의 판매조직원들은 미국과 인도 등지에서 향정신성의약품을 비타민제로 위장해 몰래 들여온 뒤 약물 중독자들에게 비싼 값에 팔아 넘겼다. 이들의 ‘고객’은 대부분 불면증이나 불안 증세 치료용으로 처음 향정신성의약품을 접했다가 서서히 중독자가 됐다.
◇마약 중독으로 가는 길=일부 향정신성의약품은 과다 복용 시 호흡곤란 등의 부작용을 유발한다. 장기적으로는 히로뽕과 헤로인 등 폐해가 심각한 마약에 손을 대게 만든다.
히로뽕 중독으로 서울 종로구의 한 상담기관에서 치료받고 있는 40대 남성 A씨는 “나를 비롯한 많은 마약 중독자 친구들이 처음엔 아티반과 러미널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접하면서 중독의 길로 빠져들었다”고 털어놨다. A씨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마약 같은 게 내 인생에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친구의 권유로 ‘별것 아니다’란 생각에서 향정신성의약품을 과다 복용한 경험이 20여년 중독자 생활로 이어졌다. 이런저런 약물들을 투약하다가 호기심에 이끌려 히로뽕까지 흡입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이런 약물부터 시작해 대마초와 히로뽕으로 점차 중독의 단계가 심각해졌다”고 말했다.
◇병원 돌며 ‘약 수집’하는 중독자들=향정신성의약품이 주는 기분을 한번 경험한 일부 환자들은 급속도로 약물에 빠져든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경기도에 사는 B씨(37)는 2009년 1월부터 6월까지 182일에 걸쳐 병원 41곳을 찾아다니며 디아제팜 149일치를 사 모았다. 하루에 병원 6곳에서 처방받은 적도 있었지만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서울 관악구 A씨(50·여)도 2010년 동네 내과의원 두 곳에서 번갈아가며 알프라졸람과 디아제팜, 로라제팜 등 항불안제 285건을 처방받았다. 한 달에 많게는 33차례 처방받은 적도 있다.
중독은 종종 범죄로도 이어진다. 2011년 3월 경남 진주에서는 디아제팜을 구하기 위해 병원 5곳을 돌며 의사와 간호사를 흉기로 위협한 30대 남성이 경찰에 구속됐다. 향정신성의약품 도난·분실 사고도 매년 수십 건 일어난다. 의사 간호사 등 약품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들이 스스로 투약하기 위해 훔치거나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 몰래 가져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대형병원에서는 잠금장치가 된 철제 금고에 향정신성의약품을 따로 보관할 정도다.
2012년 프로포폴 파문 이후 향정신성의약품 관리 문제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보건복지부는 지난해부터 보험·비보험 처방에 관계없이 향정신성의약품 사용 내역을 매달 정부에 보고토록 했다. 그러나 일단 처방 이후 환자 손에 들어간 약물의 유통 경로는 추적이 불가능하다.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
[‘중독국가’ 대한민국] ④ 마음의 병 고치려다 약물중독으로
입력 2014-06-13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