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두 달… 유가족들의 못다한 이야기… 60일, 세월은 흘러도 세월호는 멈춰있습니다

입력 2014-06-14 02:43 수정 2014-06-14 16:05
지난 9일 오전 인천 남동구 인천시청 앞 일반인 합동분향소는 조문객의 발길을 찾기 어려웠다. 다음날 확인한 공식 조문객은 32명에 불과했다. 인천=허란 인턴기자
인천 합동분향소 근처에 있는 희생자 유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 입구.인천=허란 인턴기자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일로부터 60일. 그동안 눈물을 글썽였던 적도 있다. 울적한 기분 속에 입맛 없는 밥을 먹기도 했다. 어느새 달력 두 장을 넘겼다. 지난 4일 낮 집 근처에서 투표를 했고, 13일 아침 브라질월드컵 개막전 소식에 눈길을 주게 된다. 매일 해야 할 일도 있고, 돌봐야 할 가족도 있고…. 약 두 달, 누군가는 이 참사로부터 그 시간만큼 걸어 나왔을 것이다. 북위 34도, 동경 125도. 전남 진도 팽목항 인근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는 그대로 물에 잠겨 있다. 유족들은 아직 세월호 사고가 난 그 시간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시신 290여구는 찾았지만 10여명은 아직 바닷속에 있다. 생업을 포기한 채 분향소를 지키는 인천과 안산의 희생자 유가족을 찾아갔다. 이들은 "잊지 말아 달라"고 했다.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이 나라를 '안전 사회'로 진입시키는 것만이 희생을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어쩌면 세월호라는 거대한 트라우마에서 우리 모두 탈출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일반인 분향소 세 번 지었다

9일 오전 11시쯤 인천 남동구 인천시청 앞 미래광장에 있는 합동분향소. 텅 비어 있었다. 앞선 조문자도 뒤따라오는 조문자도 없었다. 한여름을 예고하는 열기만 차 있었다. 한 봉사자가 검정색 근조 리본을 건넸다. 희생자 영정 30여개가 세워져 있었다. 안산 단원고 학생이나 교사가 아닌 일반인들이다. 조지훈(11)군 영정 앞에 멈췄다. 파란색 뽀로로 음료수, 초콜릿, 비스킷 등이 놓여 있었다.

조군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다 참변을 당했다. 장례의 의미를 모르는 동생 요셉(9)군은 이날 “결혼식에 가는 거냐”며 부모와 형의 합동장례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환갑 기념 여행에 나섰던 어르신의 영정, 승무원 영정이 차례대로 있었다. 유가족 대기실 앞 펼침막에는 ‘대통령님, 우리 엄마 아빠 형 누나 조카입니다. 이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차별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일반인 희생자는 42명이다. 인근 사무실에서 만난 장종열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대책위원회 대표는 요셉군 가족의 장례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지쳐보였다. 어머니 윤춘연(61)씨를 잃은 장 대표는 “사고 초기 사후 대처가 안산 단원고 희생자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우리는 정부의 ‘손’을 잡기 위해 구걸하다시피 뛰었다. 처음엔 희생자 추모관에도 못 들어간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책임은 청소년이나 노인, 어느 생명에나 다 있는 것 아니냐. 방금 본 분향소는 세 번째 지어진 거다. 처음엔 실외에 영정을 세우게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실내 공간을 만들었다. 좁았다. 제대로 된 분향소는 이달 초에야 간신히 만들어졌다.”

단원고 학부모들이 구조 방법을 제시하며 정부 측에 ‘매달린’ 것처럼 일반인 유가족은 최소한의 관심을 호소했던 것이다. 대책위는 진도 팽목항과 장례식장을 직접 수소문해 유족을 파악했다. 정부 측에서 개인 신상 정보라는 이유로 연락처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실 운영 경비와 진도를 오가는 교통비 등은 유가족 회비로 충당하고 있다.

세월호에 승선한 재중동포는 ‘이중(二重)’ 무관심 속에 있다. 미성년도, 내국인도 아니기 때문이다. 동생 금희(37)씨를 잃은 한영희(49)씨는 “동생은 10년 넘게 한국에서 일했다. 석 달 연속 하루도 쉬지 않고 휴대전화 부품 업체에서 일하다 지쳐서 간 여행이었다. 앞으로 어떤 대책이 있는지 TV 뉴스를 통해 듣고 있다. 내가 사는 서울 ○○구에서는 전화 한통 없었다. 답답하다”고 하소연했다.

일반인 희생자에는 환갑기념 여행을 떠난 인천 용유초교 동창생 12명이 있다. 그 자녀들은 갑작스러운 부고 앞에 일손을 놓고 있다. 김연혁(60) 용유중앙교회 장로의 차남 민원(29·인천숭의교회)씨는 “아버지는 평생 바다에서 사신 분이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꽃게를 잡고 양식어장을 관리했다. 이젠 아버지를 삼킨 바다가 너무 끔찍하다. 이후 배를 못 탔다.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날 인천분향소 조문객은 32명이었다. 초기엔 하루 수백명이 조문했다.

효율이라는 ‘괴물’과 싸우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슬픔의 도시’ 안산. 거리 곳곳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등의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같은 날 오후 3시쯤 도착한 안산 단원구 정부합동분향소 앞 화랑공원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2520㎡ 규모의 분향소, 서너 명의 조문객이 영정 앞에 머무르고 있었다. 300개 가까운 영정 앞에 묵념하고 출구로 나올 무렵. 분향소 전체를 울릴 만큼 큰 통곡이 들려왔다.

“○○야, ○○야∼ 엄∼마 왔다∼.”

돌아보니 두 사람의 부축을 받은 한 여인이 영정 앞에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식 잃은 어미의 통곡에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조문 후 딸 예은(16·단원고2)양을 잃은 유경근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 대변인을 분향소 앞에서 만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화공단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던 유씨는 대변인을 자원했다. 바쁘게 지내면 고통을 느낄 시간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8시쯤 나와 자정 넘어 귀가할 때가 많다. 집에 가서도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한다.

“유가족 모두 수시로 ‘내 여기 왜 있지?’ 묻곤 한다. 자고 일어나면 꿈일 거라고 기대하면서 새우등을 하고 잔다. 근데 일어나면 이게 꿈이 아니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건 내가, 우리 아이가 언제든 효율이라는 이름의 이 시스템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 미간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노후한 세월호의 과적, ‘관피아’로 명명되는 비리 고리, 불안정한 승무원의 고용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가족 모두 함께 고민했다. 결론은 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1000만명 서명운동(sign.sewolho416.org)은 그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다.”

감리교인이기도 한 그는 한국교회에 적극적인 서명운동 동참을 요청했다. 유가족들은 앞으로 세월호 참사 관련자 재판을 계속 방청할 계획이다.

“처벌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진상규명의 한 결과일 뿐이다. 안전은 생명과 직결된다. 대형 참사는 안전이 아니라 ‘돈’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다(마 6:24).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후 1명뿐이던 전동차 기관사를 2명으로 늘리게 됐다. 그런데 비용 절감 명목으로 다시 1명으로 돌아갔다. ‘제2의 대구지하철 참사’가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있다가 수장됐다.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꼭 우리가 살아갈 이 나라의 시스템을 바꿀 것이다.”

처절한 결연함이 느껴졌다. 서명운동에 동참한 이는 100여만명.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모여 있는 전남 진도 팽목항. 진도군교회연합회 소속으로 봉사활동을 총괄 지휘하는 조원식(55) 진도 신진교회 목사는 13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은 가족이 줄어들수록 절망감은 더 커지는 것 같다. 하루 2000명 가까이 되던 봉사자가 이젠 200여명 정도로 줄었다.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다. 유가족의 고통을 잊지 않고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롬 12:5)”고 말했다.

인천·안산=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