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혜진] 월드컵과 독서

입력 2014-06-13 02:19

길고 긴 불황을 뼛속까지 체감하는 출판계에서 두려워하는 게 있는데, 다름 아닌 월드컵이다. 월드컵 기간엔 온 국민의 눈과 귀가 다 쏠려 책을 사보지 않으니 가뜩이나 6월 비수기가 더 힘겨워진다. 그래서 연초에 출간 계획을 세울 때부터 중요 도서를 다른 시기에 배치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작가분들이 왜 책을 내지 않느냐고 물어오면 ‘올해 월드컵이 열려서’라는 게 변명 아닌 변명이 되곤 한다. 이토록 나의 ‘업’을 위협하는 줄 알면서도 월드컵이 다가오면 가슴이 붕붕거리고 밤새워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게 된다.

월드컵 쏠림 현상의 시발점은 단연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 무렵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과 소개팅을 하게 되었는데, 회사 방향이 같던 우리는 아침마다 카풀을 하며 고소한 만남을 즐기곤 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는 어이없는 다툼으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다름 아닌 월드컵 때문이었다. 유학을 준비하던 그에게 미국에 가서도 열심히 응원하라고 당부하자, 너무도 냉정하게 “왜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당신은 한국인이고, 우리 팀은 국민의 염원인 16강에 진출해야 하고, 승리해야 하니까요!”라는 나의 외침에 되돌아온 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온 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열광하는 게 정말 이상해요. 즐길 권리가 있으면 즐기지 않을 권리도 있습니다.” 차 안에 싸하니 냉기가 감돌았다. 목적지에 다다라 이런 냉혈한과는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차에서 내려버렸다. 지금 보면 참 유치한데, 시간이 흐를수록 대대적인 열광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이들의 입장도 십분 이해하게 된다.

월드컵 여파로 세월호에 대한 진상규명을 비롯하여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이 묻혀버릴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단체 응원은 물론 TV 시청도 하지 않겠다는 지인의 SNS 글에 댓글이 이어지며 찬반이 분분했다. 월드컵의 마력을 재확인시켜 준 순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월드컵 자체가 아니다. 제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한 달 남짓한 잔치이고, 누군가에게는 꿈과 희망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터.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그라운드에서 떼 지어 달려가면서 정작 어느 골대를 향해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어버리는 우리들의 집단적 무신경이 아닐까. 문득 책이 안 팔리는 게 월드컵 때문은 아니라는 자기반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혜진(해냄출판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