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화산 폭발로 형성된 강이다. 북녘 땅인 강원도 평강군 추가령계곡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군사분계선을 넘어 철원군, 포천시, 연천군을 거쳐 전곡에서 임진강과 합류할 때까지 136㎞를 구절양장 흐른다. 27만년 전 시뻘건 용암이 흐르던 한탄강은 오랜 세월의 침식을 거쳐 곳곳에 현무암 협곡을 비롯해 소(沼)와 폭포 등 그림 같은 절경을 빚어 놓았다.
철원평야를 흐르는 동안 비교적 완만한 물굽이를 그리던 한탄강은 철원 고석정을 지나 포천 땅에 들어서면서 대교천을 비롯한 지천과 함께 본격적인 동양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대교천 현무암 협곡을 비롯해 샘소, 화적연, 멍우리 주상절리대, 교동 가마소, 비둘기낭폭포, 구라이골, 아우라지 베개용암 등이 대표적으로 포천의 '한탄강 팔경'으로 불린다.
천연기념물 제436호로 지정된 관인면 냉정리의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한탄강 팔경 중 제1경으로 폭 25~40m, 높이 30m에 이르는 주상절리가 1.5㎞나 이어진다. 짙은 녹음 속에 숨은 협곡 속으로 들어가면 부챗살이 퍼진 모양의 방사성 절리를 비롯해 돌단풍이 수를 놓은 현무암 협곡이 신비한 속살을 드러낸다. 포천과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대교천 현무암 협곡은 포천에서는 접근이 어렵지만 철원에서는 협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두 곳 정도 있다.
제2경인 샘소는 한탄강 본류이자 래프팅 명소로 유명한 순담계곡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관인면 냉정리의 스카이펜션 앞 절벽 위에서 볼 수 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사계절 마르지 않은 샘이 있어 샘소로 명명된 순담계곡에는 왕건에게 쫓겨 달아나던 궁예가 말과 함께 잠시 쉬어갔다는 말등소도 있지만 어디쯤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한탄강이 빚어 놓은 절경 중에서도 영북면 자일리와 관인면 사정리 경계에 위치한 제3경 화적연(禾積淵)은 특히 빼어나다. 명승 제93호로 지정된 화적연은 한탄강 강물이 모여 깊은 못을 이루는 곳에 산에서 뻗어 나온 13m 높이의 거대한 화강암 바위가 추수한 벼를 쌓아놓은 노적가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짙푸르고 강 가장자리에는 모래밭이 펼쳐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한다.
금강산 가는 길목에 위치한 화적연은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경승이다. 화적연을 노래한 조신시대 시인은 박순, 박세당, 박제가, 이항로 등 20여명. 대한제국 말기에는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이 화적연을 찾아 '신룡이 돌이 되어 깊은 못으로 들어가니/ 볏가리 높이 쌓아 별천지가 되었구나/ 푸른 절벽 아래로 천천히 걸어가서/ 벽옥 같은 여울에 앉아 낭랑히 노래하네'라는 시를 남겼다.
금강산 유람길에 나선 겸재 정선도 화적연의 절경에 반해 가던 길을 멈추고 붓을 들었다. 당시 그림은 전하지 않지만 72세에 다시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에 진경산수화의 대가답게 불쑥 솟아오른 바위의 끝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협곡 높이와 같게 그린 '화적연'이 전해온다.
제4경인 멍우리협곡의 주상절리대는 화적연에서 되돌아 나오다 왼쪽 산길을 타고 5㎞ 정도 달려야 만날 수 있다. 멍우리협곡 전망대 가는 길은 첩첩산중이지만 이따금 마을과 농장이 번갈아 나타난다. 멍우리협곡 주상절리대가 한눈에 보이는 포인트는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500m 거리. 비포장 길인데다 풀이 많이 자라 사륜구동차가 아니면 접근이 어렵다.
멍우리협곡은 한탄강변을 따라 수직으로 주상절리가 발달해 풍광이 매우 수려하다. 한탄강의 다른 협곡과 달리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생긴 높은 절벽인 하식애(河蝕崖)의 양안이 모두 주상절리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길이 약 4㎞에 높이 20~30m에 이르는 멍우리협곡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멍우리'는 가파른 길을 내려가다 넘어져 몸에 멍울이 생길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한탄강 대부분이 협곡이지만 전망대에서 보는 멍우리협곡은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는 별명이 전혀 손색 없어 보인다. 초록물이 흐르는 협곡 뒤로는 명성산을 비롯해 국망봉, 산정호수, 영북면 소재지가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탄강여울길은 짙은 숲 속으로 사라진다.
관인면에 위치한 제5경 교동 가마소는 한탄강의 지천인 건지천 하류 부근의 현무암 계곡으로 못의 모양이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마소 내에는 작은 폭포가 있는 폭포소, 용이 놀았다는 용소, 궁예가 옥가마를 타고 와서 목욕을 했다는 옥가마소 등이 눈길을 끈다.
제6경은 영북면 대회산리에 위치한 비둘기낭폭포다. 천연기념물 제537호로 지정된 비둘기낭폭포는 불무산에서 발원한 대회산천의 하류에 형성된 협곡으로 대회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에서 폭포수를 이루며 흐르다 한탄강과 합류한다. 수백 마리의 산비둘기가 서식했다고 해서 비둘기낭으로 불리는 이곳은 한탄강변에 있던 폭포가 수십만년 동안 침식으로 인해 뒤로 물러나면서 깊은 계곡과 함께 아늑한 보금자리를 형성하고 있다.
비둘기낭폭포는 장쾌한 물줄기와 그 아래 푸른빛의 물이 주변의 주상절리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절경을 보여주지만 안타깝게도 오랜 가뭄으로 폭포수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아 '최종병기 활' '추노' '선덕여왕' '늑대소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창수면 운산리에 위치한 제7경 구라이골은 40m 길이의 주상절리 협곡이지만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하류에서 포천과 연천의 구절양장 경계선을 달리는 한탄강은 군부대의 포성을 자장가 삼아 끊임없이 흐른다. 그리고 영평천과 합류하는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한탄강 팔경의 마지막 비경인 제8경 아우라지 베개용암이라는 절경을 빚는다. 아우라지는 두 강물이 만나서 어우러지는 곳이라는 뜻.
베게용암은 현무암이 물과 만나 급랭하는 곳에서 베개 모양으로 둥글게 만들어진 것으로 제1경인 대교천 현무암 협곡을 포천이 아니 철원에서 감상하듯 제8경도 포천이 아닌 연천에서 볼 수 있다.
철원 경계에서 포천을 거쳐 연천 경계에 이르기까지 40㎞를 달려온 원시의 한탄강. 큰 여울이라는 뜻의 한탄강은 강태공들이 세월을 낚는 아우라지 나루터에서 비로소 넉넉한 풍경화를 완성한다.
포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겸재가 발걸음 멈추고 붓을 든 까닭은?…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 포천 한탄강 팔경
입력 2014-06-12 0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