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16일 크레스트 시큐리티즈(크레스트증권)라는 낯선 기업이 충격적 내용을 공시했다. 1689억원을 들여 국내 최대 정유회사이자 SK그룹 핵심 계열사인 SK㈜ 지분 14.99%를 매입했다는 것이다. 자산 규모 17조원에 이르는 거대 기업의 최대주주로 단숨에 올라섰다. 크레스트증권은 모나코에 있는 소버린자산운용의 100% 자회사이며, 경영 참여를 목적으로 지분을 샀다고 밝혔다.
당시 SK㈜는 SK텔레콤, SK글로벌 등 7개 계열사의 최대주주로 순환출자 고리에서 핵심이었다. 하지만 오너 일가 지분은 매우 적었다. 최태원 회장(당시 0.98%)을 비롯해 총수 일가가 직접 보유한 지분은 1.39%에 그쳤다.
경영진 교체 등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던 소버린은 2년 뒤인 2005년 7월 18일 지분을 모두 팔고 철수했다. 주가 상승 등으로 원금의 4배가 넘는 9437억원을 챙겼다. 겨우 경영권을 지켜낸 SK그룹은 2007년 7월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을 선언했다.
‘소버린 사태’는 순환출자를 바탕으로 거대 그룹을 장악하는 취약한 지배구조는 언제든지 외국자본에 농락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2014년 현재, 삼성그룹이 얽히고설킨 순환출자 구조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최근 삼성은 사업구조 및 지배구조 개편작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삼성의 최종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7.21% 지배력’이 모든 고민의 출발선
삼성은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 삼성물산을 축으로 하는 모두 54개(지난해 6월 기준)의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계열사끼리 꼬리를 무는 형태로 지분을 주고받아 지배구조를 형성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삼성생명 지분 20.76%를 지렛대로 삼성전자, 삼성물산을 장악하고 있다. 핵심은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삼성그룹 자체다. 그룹 전체 매출(2013년 390조원)에서 60%가량을 차지할 정도다. 하지만 이 회장 일가가 직접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너무 적다. 5%가 채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삼성그룹이 안고 있는 고민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21%’에 의존하는 삼성전자 경영권에 있다. 현재는 순환출자 고리를 바탕으로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3세 승계에 따른 지배력 약화 및 지분 분산, 각종 규제 등에 따라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가장 큰 변수는 금융규제다. 우선 비금융회사에 대한 금융회사의 의결권 제한이 강화되고 있다. 기존 15%였던 제한선이 지난해 10%로 낮아졌고, 매년 1% 포인트씩 줄어든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2018년에는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이 5%로 뚝 떨어지게 된다.
보험업법 개정도 큰 장애물이다. 보험업법은 보험사가 자산의 3% 이내에서만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도록 규정한다. 최근 야당 의원들 발의로 계열사 주식가치 산정기준을 취득원가에서 시가로 바꾸는 개정안이 논의되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보유 주식 가운데 약 90%를 팔아야 한다.
흑묘(黑猫)든 백묘(白猫)든 쥐만 잘 잡으면…
지난해 9월부터 삼성그룹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구조 개편은 ‘오너 일가의 삼성전자 지배력 강화’로 볼 수 있다. 삼성그룹은 3∼4년동안 계열사를 팔고 사고, 인수·합병하면서 사업구조를 바꿔나갈 것으로 보인다. 사업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거미줄 같은 순환출자 구조를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 갖가지 해석만 난무한다. 삼성그룹 입장은 애매모호하다. 일단 삼성은 지주회사 체제로 가는 데 너무 많은 자금과 시간이 든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금산분리(산업자본이 금융계열사를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규정이 적용된다. 이에 따라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삼성생명 7.21%, 삼성화재 1.26%) 약 18조원을 지주회사가 사들여야 한다.
이 때문에 삼성은 지주회사 쪽으로 발길을 완전히 틀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지주회사가 선이고, 순환출자가 악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순환출자냐 지주회사냐는 선택사항일 뿐이다. 투명경영, 튼튼한 경영권, 뛰어난 실적이 담보된다면 무엇을 택하든 비난할 순 없다.
환골탈태냐 현상유지냐
현재까지 윤곽이 드러난 밑그림은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의 잔가지 치기다. 전자·부품소재 부문 계열사는 삼성전자, 건설·중화학 및 기타 계열사는 삼성물산, 금융 부문은 삼성생명 밑으로 모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삼성에버랜드를 상장하겠다고 밝히면서 혼선이 생겼다. 순환출자 고리에서 핵심인 삼성에버랜드를 상장하면 '소버린 사태'처럼 외국자본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상장을 결의했다. 무엇 때문일까.
삼성에버랜드 상장은 최대주주인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강화가 주요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상장 차익을 이용해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각 계열사'로 이어지는 출자 고리를 더욱 단단히 할 수 있다. 다만 삼성에버랜드 상장은 '선택의 시간'을 앞당긴다. 순환출자를 유지하느냐 지주회사로 가느냐의 선택이다.
현상유지로 간다면 자잘한 순환출자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에버랜드'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물산→삼성에버랜드'라는 굵직한 고리만 남겨둘 가능성이 높다. 적은 비용으로 지배력을 높이고,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회사도 보유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오너 일가의 삼성전자 지배력이 취약하다는 점은 깔끔하게 해결이 안 된다. 오너 일가의 삼성생명 지분 또는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순환출자 고리가 무너질 수 있다.
반대로 지주회사로 간다면 그룹 전체에 대한 지배력이 탄탄해진다. 향후 3세 간 계열분리도 쉬워진다. 반면 비용·시간이 너무 든다. 금산분리 규정 때문에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를 잃을 수도 있다. 다만 중간금융지주회사 제도가 도입되면 금융계열사를 그대로 갖게 된다.
이처럼 장단점이 뒤섞여 있어 삼성이 여론 분위기, 법 개정 등 여러 흐름을 지켜보며 시점과 방법을 저울질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삼성 고위 임원이 "지주회사 전환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 것도 지나치게 앞서가는 시장을 식히기 위한 발언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에버랜드 상장 등으로 뼈대를 만든 뒤에 지주회사냐 순환출자냐 선택은 여러 사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보면서 결정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김찬희 기자 chkim@kmib.co.kr
[슬로 뉴스] 순환출자 유지냐 지주회사 전환이냐… 언제쯤, 어디로 깊어지는 고민
입력 2014-06-12 0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