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영미] 노인을 위한 나라

입력 2014-06-12 03:59

어떤 죽음은 기억되고 다른 죽음은 잊힌다. 집단기억의 측면에서 보자면 죽음에도 분명 시효란 게 존재한다. 세월호라면 시효가 수십년은 될 거다.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고의 시효는 후하게 쳐서 채 1주일이 안됐다. 관심의 형평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스물한명의 죽음을 간단히 잊은 데는 잊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을 거란 얘기다.

장성의 요양병원은 장기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병원’이라기보다는 거동 불편한 노인들을 수발드는 ‘시설’에 가까운 곳이다. 비슷한 성격의 요양병원은 10년 사이 10배나 급증했다.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 후 요양시설은 4000개 넘게 생겼다. 이 숫자만 합산해도 수십만명의 노인들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으며 모여살고 있다는 계산이다.

이건 고마운 일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자녀에게 부양을 기대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가족은 떠났고 노인들은 혼자 남았다. 그 빈자리를 건강보험과 요양보험이, 의사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메워주고 있다. “노년은 사람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시기지만 그 때가 되면 노인의 몸에 손대는 건 의사밖에 없다”며 어느 작가는 냉소했지만, 의사면 어떤가. 아무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제도에 대한 만족도 역시 높다. 시대가 달라졌고, 맞춤하게 제도가 생겼고, 잘 굴러가고 있다.

기억해둘 건 이런 긍정적 평가가 이용자인 노인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이다. 노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그림은 다소 못나진다. 어느 요양보험 담당자는 “제도 덕에 노인들이 행복해졌는가 자문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전해준 사연 중에는 시설 들어갔다가 집이 없어져버린 할머니 이야기도 있었다. 등급이 떨어져 요양원을 나가야 할 처지가 됐는데 자식들이 재산을 나눠 가져버린 뒤라 돌아갈 집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는 “사람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자식들이 재산 노리고 부모에게 시설 입소를 권하는 게 아주 드문 일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극단적 악용 사례가 아니라도 요양제도가 노인 대신 가족 입장에서 운영되는 흔적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한 시설 운영자는 제일 중요한 업무로 ‘환기’를 꼽았다. 환기가 위생의 척도이긴 하지만 환기라니? “방문한 가족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환기가 업무 1순위가 된 이유가 이해됐다. 반면 치매환자를 위한 인지치료나 운동 프로그램이 제대로 운영되는 시설은 많지 않다. 환자의 건강 및 복지와 직결되지만 가족이 민감해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가 집으로 찾아가는 방문요양은 목욕 산책 운동보다 빨래 청소 설거지 같은 가사보조서비스에 가깝게 변질된 지 오래다. 역시 가족 눈높이에 맞춘 결과다. 무엇보다 노인 입장에서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여생을 보낼 방에 침대 4개를 가로 세로로 구겨 넣을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성 사건에서 증언이 나온 환자 결박이나 신경안정제 투여 같은 학대는 말할 것도 없다.

요양시설이든, 요양병원이든 제도의 설계도 안에 수발들고 간병하는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뜻이 담겨 있는 건 맞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간병과 봉양이 가능한 구조가 아니다. 복지가 튼실해 경제적 걱정 없이 가족을 위해 무한정 시간을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존과 돌봄의 짐을 온전히 개인의 어깨에 올려놓고, 치매살인이 나면 온 사회가 들끓는 건 위선일 거다.

그래서 시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오해를 부를 소지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는 걸 부끄러워하도록 만드는 게 해결책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요양제도가 가족을 위한 것이라는 착각은 곤란하다. 요양제도는 노인을 위한 것이다. 마지막을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보낼지 선택권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리고 그 끝은 인간다운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출발해야 장성 같은 비극이 또 생기지 않는다.

이영미 편집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