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25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 경기장. 프랑스월드컵 E조 예선 3차전 한국 대 벨기에 경기. 수비수 이임생은 후반 22분 상대 공격수의 발길질에 머리를 다쳤다. 얼굴에는 피가 흘러내렸고, 유니폼까지 얼룩졌다. 치료를 위해 그라운드 밖으로 나온 그는 울먹였다. 의료진에게 “빨리 빨리”를 외쳤다.
그라운드로 돌아와선 벨기에 공격수들의 잇따른 슛을 온몸을 던져 막아냈다. 말 그대로 육탄방어였다. 한 손으로는 자꾸 벗겨지는 붕대를 잡고 다른 손으론 흐르는 땀과 피를 닦으면서다. 이임생은 말 대신 온몸으로 동료 선수들과 소통했다. 27세 청년 이임생의 붕대 투혼은 유상철의 슬라이딩 동점골로 이어졌다. 그가 지켜낸 것은 승점 1점이 아니었다.
프랑스월드컵 벨기에戰의 기억
멕시코전 1대 3 패배에 이어 거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에 0대 5 패배. 그리고 사상 초유의 월드컵 기간 중 차범근 감독 경질. 차범근호의 침몰 와중에도 이임생은 희망의 씨앗을 지켜냈다. 외환위기로 신음하던 국민들에겐 희망을 던져줬다.
그리고 4년 뒤 2002년 6월 10일 대구월드컵경기장. 미국과의 한일월드컵 D조 조별리그 2차전. 전반 21분 34세의 대표팀 최고참 황선홍은 상대 수비수와 공중볼을 다투다 오른쪽 눈 부위가 찢어져 그라운드를 뒹굴었다.
치료를 위해 그라운드를 나온 사이 미국은 먼저 득점에 성공했다. 황선홍은 의료진에게 소리쳤다. “빨리 감아.” 붕대를 감은 황선홍은 후반 10분 안정환과 교체될 때까지 마지막 땀방울까지 아낌없이 쏟아냈다.
안정환의 천금같은 헤딩 동점골보다 노장의 붕대 투혼이 더욱 빛났다. 이임생이 지켜냈던 희망의 씨앗은 황선홍에 의해 싹이 틔워져 4강 신화의 꽃으로 피어났다.
2006년 6월 23일 독일월드컵 G조 예선 한국과 스위스의 최종전이 열린 하노버 월드컵 스타디움. 아드보카트호의 맏형 최진철은 전반 23분 상대 장신 수비수와 부딪히며 오른쪽 눈두덩이 찢어졌다. 이마에 감은 붕대를 고정시키기 위해 하얀 망사로 된 모자를 머리에 쓰고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경기 끝까지 그라운드를 지켰다.
한일월드컵 이후 태극마크를 반납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부상보다는 내가 막지 못해 골을 먹었다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라고 했다.
2014년 6월 대한민국 국민들은 실망했다. 지난달 28일 튀니지전 0대 1 패배에 이은 지난 10일 가나전 0대 4 패배. 지난해 6월 홍명보호 출범 이후 치른 총 16차례 A매치(5승3무8패) 가운데 최다 실점 패배 타이 기록이다. 수비 불안, 역습 차단 실패, 무딘 공격 등 수많은 비난의 단어가 쏟아졌다.
한국 축구의 상징이던 투혼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데 국민들은 더욱 실망했다. 1998년 이임생, 2002년 황선홍, 2006년 최진철이 현 대표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극전사들의 기적 가능하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결전의 땅 브라질에 11일 밤늦게 입성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57위. 이번 월드컵 본선 참가 32개국 중 31위다. 사실 조별 예선 통과는 물론이고 1승조차 쉽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18일 아침 7시 러시아와의 브라질월드컵 1차전까진 1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지금 우리 대표팀에게 필요한 것은 수비 조직력 확보, 공격력 강화가 아니다. 이임생이 보여줬던 투혼이다. 우리 국민들은 기대한다. 좋은 성적이 아니라 태극전사 23인의 투혼을 말이다. 투혼만 살아난다면 1주일의 기적도 가능하다. 한국 축구대표팀 파이팅.
김영석 체육부장 yskim@kmib.co.kr
[데스크시각-김영석] 이임생의 붕대 투혼
입력 2014-06-12 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