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신 회장의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 기업 분위기상 30대에 임원 자리에 오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하나로샴푸로 소위 대박을 치자 회사는 ‘이미 부장급 능력이 있는데 과장으로 두기는 아깝다’며 그룹 최초로 과장이면서 부장 업무를 하도록 했다. 네덜란드인 부장을 거치지 않고 프랑스인 상무에게 직접 보고하는 ‘생활용품 마케팅 헤드’가 된 것이다. 이 소문이 헤드헌팅 업계에 퍼져 이런저런 제안이 들어왔다. ‘발전을 위해 회사를 떠날까, 의리상 애경에 머물러야 할까.’ 고민이 많았지만 ‘변화는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고 창조하는 것’이란 신념에 따라 다이알코리아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장 회장에겐 ‘유학 가면 4년 정도 걸리니까 그 기간 외국 기업에서 마케팅 기법을 배우고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이직을 감행했다.
다이알코리아는 6개월 뒤 성과를 보고 중역 직함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무실과 비서, 차 등의 대우는 모두 중역급으로 제공하겠지만 공식 직함은 성과를 본 뒤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직 후 나는 6개월간 매달 한 개씩 신제품을 냈다. 성과를 확인한 회사는 마케팅 중역인 마케팅디렉터로 발령을 냈다. 이때 내 나이가 35세였다. 젊은 나이에 중역이 되자 성취감이 대단했다. 이 모습을 장인어른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회사로 초청해 사무실을 보여드린 뒤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아내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드리고 싶어서였다. 두 분의 표정은 참 밝아 보였다. 사위가 사무실을 혼자 쓰면서 비서까지 두고 있는 걸 보시고 당신 딸이 큰 고생은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으리라.
돈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버는 것이다. 나만 행복하려고 일하고 돈을 벌면 뭘 해도 재미가 없다. 나로 인해 가족과 상사, 주위 사람이 행복해하면 훨씬 더 보람 있고 힘이 난다. “왜 이렇게 많이 썼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같이 써줄 사람이 있어 행복한 것이지, 번 돈을 모두 쌓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2년 뒤 나는 한국로슈 마케팅 이사로 다시 이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분명 외국 회사에 가서 배우고 다시 온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4년 됐으니 다시 오십시오.” 회장이 직접 한 제안이긴 했지만 월급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했으므로 고민이 됐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고 기회를 준 장 회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느 회사도 뽑아주지 않아 정말 힘들 때 ‘저 사람만은 해낼 것’이라며 의심 없이 믿어준 은인이 아닌가.
‘돈보다 의리란 생각’으로 갔지만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 세계에선 상사한테 인정받는 것 이상으로 큰 기쁨이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상사가 날 믿고 맡긴 모든 일이 의도한 방향으로 척척 들어맞는데다 적자를 내던 회사가 1년 안에 흑자로 전환되자 그렇게 통쾌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무슨 일을 할까 기대되고 즐거운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직원이 자질을 제대로 갖춰야 회사의 미래가 밝다고 믿는 사람이다. 애경에 돌아가자마자 부하직원을 대상으로 마케팅 교육을 시작했다. 애경-유니레버 합작 당시 유니레버는 마케팅 스쿨을 운영했는데 6개월에 한 번씩 아·태지역 마케터를 모두 불러 1주일간 마케팅 이론을 가르쳤다. 현장의 마케터에게 마케팅을 다시 가르치는 게 굉장히 신선했다. 로슈와 다이알에서도 마케팅 스쿨을 몇 차례 다녔다. 당시 국내에 나만큼 현장에서 마케팅 훈련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선진 마케팅 기법을 전수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매주 마케팅 스쿨을 열어 후배들에게 마케팅의 기초부터 철저히 가르쳤다. 또 ‘시키는 대로 일하지 마라’ ‘자신감 있게 제안하라’는 경험이 담긴 조언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이는 훗날 애경이 ‘마케팅 사관학교’라는 애칭이 붙는 계기가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조서환 (8) 이직 4년째 애경 장 회장 콜에 ‘돈보다 의리’ 선택
입력 2014-06-12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