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내 안에 영이 살지 않는 한, 육이 살 수 없고 삶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영혼의 이성이 구원의 길인 주님을 깨닫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타 종교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 헐어져 가는 집에 지붕만 바꾼 것과 같은 엉터리 신앙이라면 참 곤혹스러울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서 이방인처럼 살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크리스천은 얼마 없고 세상 풍습에 물든 교인들이 넘치는 곳이 현대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까.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좌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유혹이 와도 물리치는 새 힘이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악조건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내 안에서 성령의 자유함이 넘치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춤을 추십니다. 주님이 나로 인해 즐거워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 이에 대한 거룩한 고민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자신의 영성에 대해 너무 무심한 것도 죄입니다. 자신의 영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고 안일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한 침노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삶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안 됩니다. 육적인 삶을 벗어나야 합니다. 과감하게 탈출해야 합니다.
주님은 육체와 정신이 십자가의 고난 전과 후가 같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도 모욕과 수치를 당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몸과 정신과 영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타격을 받으면 금방 육체와 정신이 흔들립니다. 신앙의 근간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를 초월해야 진정한 기독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단순히 인간을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 정도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교육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영혼은 그리스도를 만나야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열고 안방 문을 열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침노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막 뜰과 성소를 지나 지성소와 법궤 안까지 깊숙이 진입하는 거룩한 침노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마당 뜰만 밟지 말고 진정한 영의 교제 영역으로까지 들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고 속사람을 회복할 때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때는 유혹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의 시험에 든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침노가 자신의 영성에서부터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한 사람의 변화와 성숙은 바로 만민의 변화와 성숙을 견인하기에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배익환 인천 제자감리교회 목사
[오늘의 설교] 거룩한 침노
입력 2014-06-11 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