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에 도착한 그 집은 조그마했다. 낡고 좁은 툇마루와 숱한 창백한 신발들이 다녀갔을, 어딘가 닳아버린 잿빛 댓돌, 칠이 벗겨진, 나무의 실핏줄이 다 드러난, 흐린 기둥…. 내 기억의 저장고 속에 남아 있는 퇴계의 집 그림이다. 그림 하나가 또 끌려나온다. 어두컴컴한 그 방, 그 방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라곤 홑이불이라도 얹혔을 듯한 좁은 시렁,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소반 하나와 먼지 낀 등잔, 그리고 더 어두운 아궁이로 향하는 허연 창호지 문…. 상상컨대 퇴계의 공부방이 아니었을까. 그 정오, 작은 흑고동빛 소반과 먼지 낀 등잔은 창호지 문을 기웃거리는 나에게 소곤거렸다.
‘…이렇게 어둡기에 퇴계는 혼천의(渾天儀)를 고안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는 이 캄캄함 속에서 우주의 빛을 보았던 것이지요. 이 어둠과 조그만 공간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혼천의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거예요.’
혼천의는 말하자면 우주본이 아닌가. 그 우주본에는 어둡고 좁은 그 방이 탄생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좁은 소반, 거기서 수많은 성리학의 지식들이 나왔다니. 아니지, 말하자면 책상이 그리 좁았기에 퇴계의 그 엄청난 사상들은 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었겠지.
나는 내 넓고 좋은 책상과 눈부신 LED스탠드가 부끄러워진다. 내 몇 권의 책도 이전에는 ‘소반’ 위에서 연필로 쓰면서 이 세상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던가. 거기에 컴퓨터는 너무 글을 쉽게, 빨리 쓰게 한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좋은 책에는 있기 마련인 적당한 지연(遲延), 그것이 없다.
하긴 어찌 퇴계의 방뿐일까. 좋은 글이나 사상을 이 세상에 새긴 이들의 방을 가보면 대체로 좁고 어둡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첫머리에 나오는 대저택의 무도회장 아치 천장은 바로 그가 살던 좁은 집의 답답하기 짝이 없는 아치 천장이 모델이었다지 않은가. 숨 막힐 듯 좁은 그 아치에서 톨스토이는 넓고 아름다운 무도회장을 보았던 것이다. 바다가 없어야, 바다가 그리워 기막힌 바다그림을 그리는 이치와 같다. 그렇다면 요즘의, 모든 것이 완비된 작가촌에서, 또는 연구실에서 과연 세계적인, 가슴에 새겨지는 문학, 사상, 또는 과학이 나올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너의 책상을 좁게 하여라. 그리하여 드넓은 사유의 파도가 그 좁은 책상과 빛을 품은 어둠 속에 일렁이게 하여라. 누군가 나의 책상 위에서 외친다. 정오,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짧은 그 열정의 순간 위에서.
강은교(시인)
[살며 사랑하며-강은교] 퇴계의 책상
입력 2014-06-11 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