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年 1억 버는 당신, 더이상 상위 5%가 아닙니다

입력 2014-06-10 02:39

어느덧 ‘연봉 1억원’으로도 ‘진짜 부자’임을 내세우기가 무색해진 사회가 됐다. 나날이 고소득층으로 부(富)의 집중이 심화됨에 따라 우리나라 소득상위 5% 인구(만 20세 이상)의 평균 연소득은 1억원을 뛰어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상위등급인 소득상위 5%는 모든 경제활동인구가 벌어들이는 소득의 30%를 넘게 벌어들이고 있다. 이 같은 경향은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기를 졸업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뚜렷해지고 있다. 성장이 고용 및 급여 증대로 이어지는 ‘낙수 효과’가 흐릿해지면서 소득 불평등의 문제가 뚜렷해졌다는 분석이다. 반면 상위 소득자는 한계세율(누진세 체계 아래서 일정한 소득구간을 넘어설 때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세율)이 낮아지고 외환위기 이후 성과주의 보수체계가 확산되면서 더욱 큰 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연봉 1억도 ‘부자 명함’ 쉽게 못 내밀어=9일 동국대 경제학과 김낙년·김종일 교수가 펴낸 ‘한국의 고소득층(Top Incomes in Korea, 1933-2010)’ 논문에 따르면 상위 5% 고소득층의 평균 연소득은 2012년 현재 1억189만원으로 1억원을 돌파했다. 2002년 7312만원에서 39.3% 높아진 수치다. 소득상위 10% 인구의 평균 연소득도 2002년 5896만원에서 2012년 7598만원으로 28.9% 증가했다. 이 수치들은 연구진이 시계열 비교가 용이하도록 물가상승률 등을 빼고 추산한 2010년 기준의 불변가격(Constant Price)이다.

고소득층 그룹에 끼기 위한 연소득의 ‘커트라인’은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2002년에는 연 8725만원을 벌면 소득상위 1%에 가까스로 들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뒤인 2012년에는 한 해 최소 1억457만원을 벌어야 ‘턱걸이’가 가능해졌다. 같은 경제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벌어들여야 하는 돈이 10년 전에 비해 19.9% 늘어난 셈이다.

이 가운데서도 소득상위 0.01%에 해당하는 ‘억만장자 그룹’의 문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초고소득층으로 간주되는 소득상위 0.01%는 2012년 현재 우리나라에 모두 3797명이 있다. 2002년에는 연 6억9692만원을 벌면 이 그룹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2012년에는 최소 11억7693만원을 벌어야 이 그룹에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고소득층은 해마다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소득상위 1%에 속하는 이들은 10년간 평균 연소득이 45.6% 증가했다. 이만 해도 놀라운 자산 증식 속도지만 초고소득층으로 갈수록 증가 폭은 훨씬 커진다. 같은 기간 소득상위 0.5%는 평균 연소득이 52.5% 늘었고, 소득상위 0.1%는 70.9% 증가했다.

이에 따라 고소득층이 전체 경제활동인구 소득에서 차지하는 소득 점유율(Income Share)도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2012년 현재 소득상위 5% 인구의 소득 점유율은 연구의 범위가 된 1933년 이후 처음으로 30%를 돌파했다(30.09%). 소득상위 10%까지 확장해 따진 소득 점유율은 2012년 현재 44.87%로 추산됐다. 10명 중 가장 돈을 많이 버는 1명이 10명 몫의 절반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얘기다.

김낙년·김종일 교수는 ‘21세기 자본론’으로 최근 유명세를 얻은 파리경제대학 토마 피케티 교수와 같은 방법론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진은 국세청에 모인 종합소득세·연말정산 신고 자료를 토대로, 피케티 등이 택한 ‘파레토 분포’를 가정해 우리나라의 소득상위 계층을 분석했다. 처벌을 무릅쓰고 국세청에 허위 신고한 사람의 몫만 제외하면 완벽에 가까운 데이터 도출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논문은 곧 권위 있는 경제저널인 일본 히토츠바시대의 ‘히토츠바시 저널 오브 이코노믹스’에 실린다.

◇‘낙수효과’ 없는 민생, 정상화 필요=지난 3일은 ‘송파 세모녀’가 반지하방 월세와 공과금 등 70만원을 봉투에 넣어두고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었다. 시민사회에서는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경제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빈곤사회연대는 송파 세모녀 생활고 자살 사건 100일을 맞아 논평을 내고 “빈곤층에 대한 우선 지원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최저생계비 이하 모든 국민에게 이유를 불문하고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혹독한 빈익빈의 민생은 경제학 연구로도 증명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고소득층의 소득 점유율은 일본이나 프랑스처럼 완만하게 유지되지 않고 영미권처럼 급격하게 치솟는 모습이다. 김 교수 등은 우리나라 경제의 ‘낙수효과’ 퇴색이 소득불평등을 심화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급속 성장기에는 경제성장이 고용 창출과 급여 증가를 동반해 소득 집중도가 낮게 유지될 수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이 효과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반면 80년대 이후 하락하기 시작한 한계세율은 고소득층에 ‘자본소득’을 창출할 기회를 줬다는 것이 김 교수 등의 분석이다.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부익부빈익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각계에서 터져나온다. 특히 낙수효과에 대한 회의론은 학계를 초월해 종교계에서도 공감대를 얻고 있다. 곧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도 고소득층에 모인 부가 소비 증가를 낳고, 이는 곧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는 낙수효과 이론을 공격하고 있다. 교황은 지난해 11월 24일 ‘교황권고문’을 발표하고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낙수효과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자유 시장체제의 이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는 “교황권고문 242개항 가운데 52∼58항이 과도한 자본주의와 빈부격차를 비판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며 해당 부분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교황은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규제였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날 배제와 불평등의 경제에 대해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황은 “소수의 소득은 확대되고, 행운의 소수들이 누리는 풍요로움에서 다수를 멀어지게 하는 간극도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