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부산, 달리는 시내버스 뒷좌석에 30대로 보이는 우석이 군청색 양복을 입고 앉아 있다. 버스 안내양이 차체를 두드린다. 곧 버스가 덜컹거리며 멈춰서고 우석이 박카스 상자를 챙겨 버스에서 내린다.”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 원작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카메라가 27초간 우석의 행동을 비췄다.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우석의 행동과 표정 등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지난 1일 오후 4시30분 홍대 카페 ‘네스트나다’에서 영화 ‘변호인’의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버전 영화를 관람했다. 관객은 채 10명이 되지 않았지만 영화가 시작되자 모두가 숨죽여 조금 ‘다른’ 영화에 빠져들었다.
암전이 되자 미리 준비한 안대를 썼다. 배우 정진영의 목소리로 영화가 시작됐다. 내레이션을 통해 영화 첫 장면과 도입부,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려졌다. 장면 하나하나가 은막 대신 머릿속에 펼쳐졌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배우의 억양이나 대사 하나하나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15분쯤 지나고 안대를 벗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귀마개를 꽂았다. 화면 위에는 한글 자막과 함께 음향기호들이 표기되고 있었다. 음향효과는 []안에 자막으로 표기돼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 식으로 설명됐다. 음악이 삽입됐을 땐 [♪경쾌한 음악 소리]와 같은 자막이 등장했다. 배경 음악은 화면 좌측 상단에 ‘♬’ 기호로 표기된다. 인물이 두 명 이상 등장하면 (김상필) (남자1) 등으로 대사 주인이 자막에 덧붙여졌다. 안대와 귀마개를 다 벗고도 관람에 불편함은 없었다. 장애인뿐 아니라 한글에 미숙한 어린아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영화에는 ‘배려’가 가득했다.
‘배리어 프리’ 개념은 1974년 유엔 장애인생활환경전문가회의가 발표한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 design)에 대한 보고서’에서 처음 소개됐다. 영화의 경우 내레이션과 자막 등을 통해 시·청각 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국내에선 ‘배리어 프리 영화위원회’가 2011년 문을 열면서 전문적으로 제작되고 있다. 위원회는 지금까지 ‘더 테러 라이브’ ‘7번방의 선물’ 등 한국영화 12편과 ‘늑대아이’ ‘위캔두댓!’ 등 외국영화 9편, 총 21편을 배리어 프리 버전으로 제작했다. 1500만원에서 2000만원까지 드는 제작비를 감당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관람료도 성인 1만원, 노인·청소년 8000원 등 일반 영화 수준이고, ‘만원’ 관객도 기대하기 어렵다보니 제작비용 회수도 힘든 상태다.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재능기부에 나선 문화예술인과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다. 지금까지 민규동 양익준 감독을 비롯해 차태현 최강희 공유 한효주 등의 배우와 성우 아나운서 등 43명이 재능기부자로 참여했다. 일본기업 스미토모상사가 처음 사회공헌으로 참여한 이래 올해는 LG유플러스가 ‘늑대아이’ 제작을 후원했다. 영화배급사인 NEW는 ‘7번방의 선물’과 ‘변호인’의 제작비를 지원했다.
정기상영관은 네스트나다를 비롯해 서울 합정동 국민TV 카페 ‘온에어’, 서울 녹번동 서울혁신파크, 경기도 성남미디어센터 네 곳이다. 김수정 위원회 상영국장은 9일 “갈 길이 멀지만 재능기부를 원하는 분들이 많아 큰 힘이 된다”며 “올해는 전문가 양성에 힘을 쏟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전수민 기자 suminism@kmib.co.kr
내레이션·자막으로 눈과 귀 대신… 장애의 벽 허문다
입력 2014-06-10 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