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모(38·여)씨는 지난해부터 한 시중은행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2010년 강씨가 2억여원을 대출받으며 지불했던 담보설정 부대비용 150만원 상당을 돌려받기 위해서다. 은행이 부담해야 할 비용을 대출고객에게 떠넘겼다는 게 주장의 골자였다. 은행 측은 강씨가 비용을 부담하기로 합의했다고 반박했다. 근저당권설정계약서상 비용 부담을 본인이 하겠다는 체크박스에 표시를 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1심 재판 도중 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당시 계약서에 대해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했다. 실제 계약서에 표시가 있는지 법정에서 확인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강씨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약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입증할 것인지, 은행이 아직까지 계약서를 보관 중인지 등을 강씨가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강씨 사례는 민사재판에서 비일비재하다. 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서를 상대방이 가지고 있을 경우 반대편 소송 당사자는 해당 문서에 대해 제출명령을 내려 달라고 재판부에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법원은 그동안 문서제출신청을 엄격하게 다뤄왔다. 신청자는 문서의 제목과 작성 취지, 보유자, 문서를 통해 증명할 사실, 상대방이 문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 등 5가지 사항을 모두 밝혀야 한다. 기준에 조금이라도 미달하면 신청은 기각 혹은 각하되기 일쑤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9일 “소송 당사자가 상대방이 갖고 있는 문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란 매우 어렵다”며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사실상 제한적으로 운용돼 온 셈”이라고 말했다.
특히 일반 국민이 국가나 대기업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 정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실제 흡연 피해자들이 제기한 담배소송에서 피해자들은 KT&G 측이 보유한 연구문서 등에 대해 제출명령을 신청했다. KT&G가 ‘담배가 유해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담배를 계속 생산해 왔다는 점 등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법원은 2000년 ‘문서가 특정되지 않았다’며 제출명령 신청을 모두 기각했다. 4년이 지나서야 연구문서 464건을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담배 첨가 향료종류 등 연구문서 197건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제출대상 문서에서 여전히 제외됐다.
‘정보비대칭’에 따른 문제점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법원 사법정책자문위원회는 지난 3일 문서제출명령 제도의 확대 적용을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건의했다. 개선책으로는 문서목록을 제출하도록 하는 방안이 꼽힌다. 국가·대기업 등 소송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는 문서를 구체적으로 알기 어려운 경우 관련 문서의 목록들을 먼저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문서 제목과 취지 등이 기재된 목록을 검토해 재판에 증거로 제출될 문서들을 추려내는 식이다. 대법원은 문서제출 기준을 완화한 가이드라인을 오는 7월 중 마련할 계획이다.
다만 문서제출명령 제도가 활성화되면서 제3자의 사생활이 침해되는 경우가 발생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올해 초 A씨는 자신의 남편과 간통했다고 의심되는 B씨 등 여성 3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B씨가 한 산부인과에 자주 통화한 사실이 있다”며 해당 산부인과가 보유한 B씨 진료기록 일체에 대해 문서명령제출을 신청했다. 대법원 최우진 사법지원심의관은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서지만 사생활이 침해당할 수 있는 경우”라며 “문서제출 완화 범위를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할지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
[기획] 국가·대기업 상대 ‘정보 격차’ 줄인다
입력 2014-06-10 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