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고무줄 부채감축계획’-단독] 부채감축계획 1년도 안돼 잇단 수정 왜?

입력 2014-06-10 03:44

공공기관들은 지난해 9월 2013∼2017년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을 확정했다. 향후 5년 동안 사업 및 부채관리 계획을 세워 국회의 심의까지 받았다. 그러나 정부가 올해 들어 공공기관 개혁을 핵심 국정과제로 들고 나오면서 이 계획은 백지화됐다. 정부는 지난 4월 새로운 중장기 계획을 확정하면서 기존 2017년도 예상 부채 총액 497조1000억원(18개 부채 중점관리 공공기관)에서 46조7000억원을 더 줄이겠다는 부채감축 계획을 다시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2월 시작된 공공기관 정상화 감사원 특정감사에서 이 계획의 부실·오류가 드러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여기에 공공기관장의 ‘목숨’이 걸린 9월 중간평가 지침이 새로 하달되면서 공공기관들은 이 계획을 또 한번 뜯어고쳐 올해 부채감축 목표를 초과 달성하겠다는 수정안을 제출했다.

1년도 안돼 중장기 계획이 세 차례나 수정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9일 “올해 수정안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기관장이 해임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든 숫자를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획재정부가 아닌 한 경제부처 관계자는 “사업이나 부채 내역이 매년 연동되는 상황에서 연도별로 얼마를 줄이겠다는 부채감축 계획은 사실상 ‘보여주기’ 효과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실제 공공기관 부채감축 성과를 조기에 가시화하려는 정부의 채근에 못 이겨 공공기관들은 사업 시기를 대거 미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수정 계획에 따라 공공기관의 사업 물량이 줄고 대금 지급 시기가 늦춰지면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국내 산업에 피해가 예상된다. 내수 회복을 위해 민간 기업에는 투자를 늘려 달라고 당부하는 것과 반대로 공공부문이 투자를 미룰 경우 경기진작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정부와 공공기관에 따르면 기재부는 지난 4월 말 18개 부채 중점관리 기관에 ‘25% 룰’을 시행한다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박근혜정부 임기 말인 2017년까지 줄이기로 한 전체 부채감축 예정액 중 올해 8월까지 25%를 조기 감축하면 중간평가에서 가점을 준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2017년까지의 부채감축 계획이 확정된 뒤 중간평가 지침, 즉 25% 룰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중간평가 대상인 18개 부채 중점관리 공공기관 중 절반이 넘는 10개 공공기관은 25% 룰을 충족하지 못한 상태였다. 부채감축 부진 하위 30%에 들어갈 경우 기관장 해임을 건의하겠다고 기재부가 엄포를 놓은 상황에서 점수에 목이 마른 공공기관들은 ‘아랫돌 빼어 윗돌 괴기’식으로 무리한 부채감축 계획을 들고 나왔다.

발전 공기업들은 신재생에너지 사업 착공 연기를 들고 나왔다. 올해 집행해야 할 사업비를 내년으로 미루는 내용이다. 남동발전은 700억원 규모의 신재생에너지 사업의 착공을 연기하겠다고 보고했다. 동서발전은 859억원 규모의 민자발전·풍력사업을 늦추기로 했다. 한전과 발전 공기업 7곳은 지난 3월 2020년까지 모두 42조5000억원을 투입해 풍력과 태양광 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이겠다고 발표했지만 사업 일정을 전면 재조정해야 할 처지다. 사업 착수가 미뤄지면 결국 지역 건설업체 등 중소 하도급 업체의 피해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수자원공사는 에코델타시티 사업 보상금 중 700억원의 지급을 미루기로 했다. 이 사업은 부산 강서구 낙동강 하구 지역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하는 내용이다. 현재 보상 절차는 생계대책 및 영농보상 등을 요구하는 주민 반대로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지역의 보상을 내년으로 미루기로 하면서 반발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기재부는 단순히 사업 시기를 미루는 방식의 부채감축 계획을 인정할지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부채감축 계획 원안에서도 일부 기관의 대금지급 연기를 인정한 바 있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까 우려하고 있다.

올해 수정안에는 ‘묻지마’ 식 자산 매각도 대거 포함됐다. 정부는 자산 매각 방식은 모두 인정한다는 방침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제값을 받지 못하거나 소액주주들의 피해도 우려된다. 대표적인 예가 한전이다. 한전은 자사주 2.9% 전량과 한전 KPS, 한전기술 등 자회사의 보유 지분을 매각해 올해 1조555억원 규모의 부채를 줄일 계획을 세웠다. 민간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한전은 1989년 국민의 재산 형성을 지원하겠다며 국민주로 상장됐다”며 “단순히 올해 부채감축 목표치를 높이기 위해 이를 매각할 경우 주가 하락으로 소액주주들의 피해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선정수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