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에서 2년 이상은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하신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세요.”(빌리 그레이엄 목사)
1973년 6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한국 전도대회’ 마지막 날 새벽 집회 현장. 그때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낯선 땅 아르메니아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스물 두 살의 청년이었던 박희수(63·예레반국립언어대) 교수는 뜨거워진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박 교수는 지금 국제교류재단 파견으로 아르메니아의 예레반국립언어대학교에서 한국어를 2년째 가르치고 있다. 지난 6일 예레반의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그는 오는 9월 이 대학의 18번째 학과인 한국어학과 개설을 앞두고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번 학기에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이 90명이 넘어요. 한국어학과 개설은 2006년 한국어가 부전공으로 처음 개설된 이후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가늠하는 잣대라 해도 무방합니다.”
아내 전경란씨와 함께 6.6㎡(약 2평) 남짓한 학교 기숙사에서 20개월 넘게 생활하면서도 박 교수는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특수학교 평교사 출신인 그는 교감과 교장, 장학사에 이어 서울지역 장애학생교육을 총괄하는 장학관까지 지낸 ‘교육계 원로’다. 평교사로 출발해 맡을 수 있는 최고 직함까지 가져본 그는 정년을 6개월 앞둔 2012년 초 사표를 냈다. 그리고 한국에서 출석하던 서울 광염교회(조현삼 목사) 성도들의 기도와 응원 속에 예레반 행을 준비하면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현직에 있으면서도 그레이엄 목사 집회 때 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이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한국어교육 전문과정을 이수하고 한국어 교원자격증까지 취득한 뒤 예레반에 도착한 그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 놀랐다. 교민이 10명도 안되는 데다 한국 대사관도 상주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교수로, 민간 외교관으로, 때로는 한국을 알리는 홍보대사로 박 교수 부부는 여러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자신들이 한국인의 ‘첫인상’이기에 일거수일투족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박 교수는 전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운 학생들이 훗날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과 아르메니아를 잇는 가교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면 좋겠다”면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들을 정성껏 섬기도록 우리 부부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레반=글·사진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대사관도 없는 아르메니아… 한국 알리는 민간 외교관
입력 2014-06-10 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