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밥을 안 먹고 술을 먹어요?”
초등학생인 막내아들의 말에 김지연(가명·39)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부터 빈 컵에 아무 생각 없이 물 대신 소주를 따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벌써 다섯 번째다. 이제는 아이들도 이런 엄마의 모습에 꽤 익숙해진 듯했다. 왜 술을 먹느냐는 질문을 “엄마, 하늘은 왜 파래요?”처럼 일상적인 궁금증 물어보듯 별 뜻 없이 한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자 지연씨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찬장에 넣어뒀던 소주를 꺼내들고 거실로 나왔다. 한 잔, 두 잔 술잔을 기울였더니 막내아들의 질문이 던져준 충격은 점점 지워져갔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난달 경기도의 한 알코올 질환 전문병원에서 만난 지연씨는 2년 전 어느 아침에 겪은 일을 이렇게 털어놨다. 그는 “어느 날인가부터 내가 식사 때마다 반주를 하고 있더라. 눈치 안 보고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아이들 등교시간이 기다려졌다”고 말했다.
지연씨의 음주는 2011년부터 시작됐다. 남편이 직장 때문에 집을 떠나 있게 되면서 술에 손을 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지연씨는 “그냥 답답해서 한 잔씩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음주 횟수는 날로 늘어갔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과 시어머니 눈치를 보면서도 술을 마시게 되더라”며 “잠깐 산책하고 온다고 하고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같은 병원에 올 2월 대학을 졸업한 조주영(가명·29·여)씨도 입원 중이었다. 휴학을 거듭하느라 늦게 공부를 마쳤는데 사회생활을 시작도 못한 채 졸업과 동시에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게 됐다. 그에게 술은 소통의 도구였다고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마시고 술의 힘을 빌려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술을 마신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굳이 이유를 들자면 좀 더 즐거워질 수 있었으니까”라고 했다.
지연씨와 주영씨는 모두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알코올 중독자와 거리가 먼 환경에서 생활했다. 주부였고 여대생이었다. 병원 신세를 질 정도가 됐지만 두 사람 다 술을 마시게 된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없다. 별 생각 없이 한 잔, 두 잔 하던 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중독으로 발전한 것이다.
최근 지연씨나 주영씨 같은 20, 30대 여성의 음주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2005년 3.1%였던 30대 여성의 고위험음주율(주 2회 이상 술을 마시고 마실 때마다 남성은 소주 7잔, 여성은 3∼5잔 이상 마시는 사람의 비율)은 2012년 8.4%로 배 이상 증가했다. 월간음주율(한 달간 1회 이상 술을 마신 사람의 비율)도 2005년 41.2%에서 2012년 48.0%로 늘었다.
이해국 가톨릭의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예전엔 생활고나 부부 갈등처럼 현실적 문제로부터 도피하려는 수단으로 술을 택하는 주부가 많았지만 요즘은 별다른 문제나 고민 없이도 술을 마시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사람들은 손을 떨거나, 일상생활을 제대로 못하거나,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중증 알코올 중독자와 달리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가정과 인간관계 전반에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강은영(가명·39·여)씨도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술에 빠진 경우다.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을 두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균형을 잘 맞춰왔는데 술이 그 균형을 깨뜨렸다. 역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퇴근길에 가끔 한잔씩 하던 게 일상이 돼버렸다. 빈틈없이 처리하던 사무실 일에 여기저기 구멍이 생기고 아이에게도 소홀해졌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종합병원을 찾아 알코올 문제 상담을 한 은영씨는 이렇게 털어놨다. “전에는 꼭 참석해야 하는 회식자리에도 얼굴도장만 찍고 바로 나오곤 했는데 요즘은 내가 발 벗고 나서서 술자리를 만든다. 취미였던 영화 관람이나 요가는 아예 손을 뗐다. 최근엔 거의 매일 술을 마셔서 아침마다 아들이 알아서 밥 챙겨 먹고 학교에 가는 날이 대부분이다.”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알코올 중독이면 자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질 가능성은 70∼90%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굳이 유전 문제를 따지지 않더라도 부모가 술 마시는 모습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건 분명하다. 지연씨도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늘 보던 아버지의 술 마시는 모습이 싫어 술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내 손에 술잔이 들려 있더라”고 했다.
가임기 여성의 알코올 중독은 태아알코올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교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여성 음주에 대한 편견이 줄면서 여성의 음주율뿐 아니라 임신 중 음주하는 여성의 비율도 늘고 있다”며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진행한 연구에서 산모의 음주에 의해 발생하는 태아알코올증후군은 1000명당 5.1명꼴이었다. 외국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수치”라고 말했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
[‘중독국가’ 대한민국] ③숨겨진 알코홀릭, 술 취한 여성들
입력 2014-06-10 0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