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홍성욱] 기술적 상상력

입력 2014-06-10 02:10

요즘 이과 문과의 통합교육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과와 문과를 구분해서 ‘너는 이과’ ‘나는 문과’ 식으로 교육을 하는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것이다. 이 근원은 1960∼70년대에 급속한 산업발전을 꾀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특정 전공에 빨리 편입시키고 전문기술을 배우게 하려던 정책에서 찾아진다.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이렇게 틀에 맞춰져서 일찍부터 하나의 전공만 교육받은 인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문·이과 교육의 폐지는 이런 시대적 요구에 우리의 교육 시스템을 맞추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문·이과 교육의 폐지와 함께 종종 등장하는 주장은 이과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교양 교육을 더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런 주장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요즘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엄청난 양의 수능 공부와 선행학습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자기 표현력이나 글쓰기 능력이 수준 이하임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며, 이는 이과 학생들의 경우에 더 심각하다. 현학적으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쓸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얘기하려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고 이를 글로 쓸 줄 아는 능력은 학제적 소통과 리더십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과학도와 기술도를 위한 교양이 인문학으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 자체도 훌륭한 교양이 될 수 있다. 과학의 역사와 과학철학은 물론이고, 진화론과 그 다양한 응용들, 현대 우주론, 뇌과학과 인지과학, 생명에 대한 깊은 이해, 양자론과 상대성이론, 실험의 방법론 등은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예비 시민들에게 필수적인 교양(liberal arts)의 일부가 된다.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계몽사상가들이 학문을 역사, 철학, 문학예술로 나누었을 때 역사의 대부분은 자연에 대한 자연사였고 철학의 대부분은 과학이었다.

이런 ‘과학적 교양’은 문과 학생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공분야의 테크니컬한 문제를 푸는 것 위주로 교육을 받는 이공계 학생들에게도 과학이 제공하는 이런 넓은 세계관을 접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난해한 철학이나 문학 같은 인문학에 대해서 진입장벽을 느끼는 이공계 학생들에게 우선 과학이 제공하는 철학적, 역사적, 문학적인 자극을 느껴 보게 하는 것은 이과와 문과라는 두 문화를 이어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최근 ‘교양으로서의 과학’ ‘문화로서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면서 좋은 강의들이 제도권 안팎으로 늘어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과학문화에 대한 논의 대부분이 ‘과학’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로서의 기술에 대한 관심이나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기술과 과학의 비교는 거의 항상 위계적이다. 과학이 호기심에 근거해 새로운 지식 그 자체를 추구함에 비해서 기술은 실용적인 상품을 추구하고, 과학이 답이 없는 영역을 탐구함에 비해서 기술은 답이 있는 문제를 푼다는 식이다. 과학에는 철학과 역사와 문화가 있지만, 기술에는 이런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상을 직접 변화시킨 것은 과학이 아니라 거의 항상 기술이었다. 위대한 기술자나 엔지니어들은 답을 아는 문제를 주어진 방법에 따라서 푼 사람들이 아니라, 남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를 예견하고 이를 창조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의 관계란 일차적으로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지만,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과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과학적 탐구 방식마저 바꾸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작업은 마치 위대한 예술가의 그것처럼 상상력과 비전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이런 ‘기술적 상상력’ 또는 ‘테크노-이매지네이션’(techno-imagination)의 재발견은 기술을 문화의 일부로, 교양의 일부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