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국가’ 대한민국②] ‘한탕’ 베팅 유혹에 빠진 하루벌이 근로자들

입력 2014-06-09 04:27
한 남성이 7일 오전 서울 청담동 한국마사회 강남지점에서 ‘오늘의 경마’ 정보지를 보며 베팅할 말을 고르고 있다. 대형 TV로 경마를 중계하는 장외발매소인 이곳은 주말이면 수백명이 모여든다. 이병주 기자

“오늘은 절대 안 들어가! 그냥 구경만 하러 온 거야…. 돈도 없어.”

7일 오전 서울 청담동의 한 빌딩 앞에서 퀵서비스 기사 A씨(52)가 서성이고 있었다. 손에는 ‘오늘의 경마’ 정보지가 들려 있다. 줄담배를 피우며 거리를 배회하더니 빌딩 정문 옆 유리창을 통해 한참동안 안을 들여다봤다. 그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 대형 스크린에 꽂혀 있었다. 스크린에는 경마 중계가 한창이었다. A씨 옆에서 비슷한 차림의 남성 5∼6명도 유리창에 얼굴을 밀착시킨 채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마사회 강남지점인 이곳은 전국에서 벌어지는 경마를 대형 TV로 보며 마권을 사서 베팅하는 ‘장외발매소’다. 매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A씨처럼 우승마를 쫓는 경마 중독자들이 모여든다. 대부분 ‘하루벌이’ 근로자들이다. 이날도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입구에는 오토바이 60여대와 택시 10여대가 줄지어 주차돼 있다. 생업 수단인 오토바이와 택시를 몰고 경마하러 온 것이다. 건물 주변 길바닥엔 담배꽁초가 수북하고 곳곳에서 한숨과 욕설이 난무했다. 경마가 시작된 지 몇 시간 안 돼서 조용하던 동네는 아수라장이 됐다.

건물 안은 더 심했다. 1층에 들어서자 수백명이 붉게 상기된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때때로 무릎을 쳐가며 베팅한 말을 응원했다. 대형 스크린 바로 앞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B씨(52)는 스크린으로 달려들 기세였다. 이미 2시간 만에 30만원을 잃었다고 했다. 말의 체중부터 최근 건강 상태까지 꼼꼼히 분석해 우승마를 찍었지만 그의 말은 순위권과 멀었다. B씨는 욕 섞인 탄식을 뒤로하고 다시 마권을 사러 발매기 앞으로 향했다.

전국 30곳 장외발매소 입장객들은 1인당 월 평균 100만원씩(2012년 기준) 쓴다. 2010년 63만원이던 게 불과 2년 만에 40만원 가까이 늘었다. 이렇게 장외발매소를 통해 마사회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전체 매출의 72.4%(2013년 기준)나 된다. 마사회는 베팅 상한선을 10만원으로 정해 놓고 있지만 현장에선 거의 무용지물이다. 대부분 당첨 확률을 높이려고 10만원짜리 마권을 여러 번 구입한다. C씨(42)도 이날 한 경기에 마권을 3장이나 샀다. 그는 “사고 돌아서서 다시 줄서서 산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한다. 상한선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C씨는 하루 100만원 이상 쓴다고 했다.

3층 흡연실에는 10여명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던 D씨(45)는 10년 동안 수억원을 잃었다고 했다. 그래도 경마가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장외발매소를 찾는다. 가게를 운영하지만 뒷전이다. 그는 “난 중독이다. 아내와도 이혼했다. 하루 벌어서 여기다 돈을 쏟아 붓는다”고 말했다. D씨 옆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용한 청담동 주택가는 이곳의 풍경과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주말마다 전쟁터로 변하는 이곳은 청담동의 ‘섬’이다. 주민들은 이 건물 근처를 지날 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며 보도 바깥쪽으로 떨어져 걸었다. 10년 넘게 이 동네에 살고 있다는 김영만(55)씨는 “2종 주거지역인데 도박장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주말이면 이 동네는 슬럼이 된다. 경마가 끝나는 시간이면 사람들이 좀비처럼 우르르 몰려나와 아무데나 앉아서 술 먹고 심지어 오줌도 싼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주택 유리창이나 건물 훼손도 많아서 집 앞에 CCTV까지 설치했다”고 덧붙였다. 오후 6시, 건물에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김씨는 한숨을 쉬더니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