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출근하면 쌓인 업무 처리로 하루가 금방 갔다. 퇴근 후엔 직장동료와 자주 회식 자리를 가졌다. 주말에는 피곤하다며 잠만 잤다. 책을 읽는 건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다.
서울 구로구 인터넷서비스업체 신세계I&C에 다니는 김평강(33) 대리. 그의 삶은 대한민국 ‘보통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대리가 4년 전부터 달라졌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스마트폰에 깔린 앱을 열어 책을 읽는다. 요즘엔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부자들의 생각 법’이라는 자기개발서에 빠져 있다. 집에 와서도 생후 14개월 된 딸과 놀아준 뒤 이내 짬을 내 30분이라도 책을 든다. 집에서 읽는 건 ‘한번에 배워 제대로 활용하는 모바일 서비스 A to Z’. 전자상품권 담당인 그의 업무와 관련된 것으로 회사의 온라인 독서 프로그램 ‘독서통신’을 통해 책을 받았다.
‘독서하는 직장인’이 된 김 대리의 모습은 신세계그룹의 독서경영, 인문학경영 덕분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사람에게 쓰는 돈은 투자이고 이를 비용으로 생각하지 말라”며 임직원들의 독서 문화를 장려했다. “인문학과 문화에 대한 관심은 훌륭한 경영자의 기본”이라는 게 그의 경영철학이다. 신세계는 2011년부터 고용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독서통신을 개설, 전 계열사 직원이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마트는 사내도서관을, 신세계I&C는 전자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룹은 책 구입 예산을 아끼지 않아 올해 독서통신과 도서관 운영을 위한 도서 구입에 각각 2000만원, 8100만원을 책정했다. 모든 비용을 회사에서 지원해 김 대리처럼 직원들은 책 읽는 데 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책 권하는 CEO 덕분에 책 읽는 직장 문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독서통신으로 전문지식 쌓고=O, X 퀴즈. “워터폴(폭포수) 모델의 개발 방식은 요구사항 분석→소프트웨어 설계→소프트웨어 구현→소프트웨어 시험의 순서로 이뤄진다.” 시험 범위는 책 ‘한번에 배워 제대로 활용하는 모바일 서비스 A to Z’의 77∼135쪽.
주말인 지난 7일 김 대리가 독서통신 사이트에서 과제로 푼 문제였다. 책을 읽은 덕에 김 대리는 쉽게 ‘O’ 표시를 했다. 독서통신은 온라인 교육을 희망하는 직원들에게 도서 커리큘럼을 정해 원하는 걸 읽게 하고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교육과정은 전문서 2개월, 일반서적은 1개월이다. 정해진 교육기간 동안 책을 읽고 인터넷에서 요구하는 과제와 시험 등을 수행해야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까지 1768명이 학습을 받는 등 인기가 있다. 김 대리 같은 열성파는 벌써 15번째 이용 중이다. 현재 독서통신에 올라온 도서는 500여권. 노동부가 도서구입비 50%를 지원하는 전문서와 전액을 자체 예산으로 해야 하는 일반서적의 비율은 1대 4 정도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여성복을 담당하는 입사 3개월차 손다은씨는 “직원에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내도서관 통해 인문학적 소양 기르고=신세계그룹 독서경영의 또 다른 축은 사내도서관이다. 지난 2012년 신세계는 서울 성동구 뚝섬로 이마트 본사에 2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도서관을 만들었다. 현재 역사 경제 예술 등 분야별 1만1000여권을 소장하고 있다. 전국으로 배송도 해줘 지방에 있는 직원들도 빌려 볼 수 있다. 월 평균 1800여명의 임직원이 이용하고 있다.
도서관이 생기면서 신세계 직원들 사이엔 인문학 바람이 불었다. CEO가 인문학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물리적 여건이 뒷받침된 것도 작용한다. 이마트 본사 마케팅 담당 정성기 대리는 이 도서관 덕을 톡톡히 본다. 한 달 평균 5권이나 읽는 독서광이 됐다. 최근 정 대리가 도서관에서 고른 것도 ‘다시 읽는 로마인 이야기’라는 인문서다. 흔들리는 중국과 미국 경제의 모습을 과거 로마제국의 역사를 통해 보겠다며 선택했다. 정 대리는 혼자 읽다가 내친 김에 책을 좋아하는 동료 10여명과 독서 소모임도 만들었다.
유통 패션 건설 등 계열사가 많은 신세계는 거리가 멀어 회사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는 임직원을 위해 전자도서관도 개설했다. 지난달 21일 문을 연 전자도서관에는 4500종, 1만3000권 이상의 전자책이 구비돼 있다. 오픈 1주일 만에 1100명 이상이 방문하는 등 호응이 뜨겁다.
신세계그룹 커뮤니케이션팀 박찬영 상무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으며 직원들이 다양한 아이디어와 지식을 공유할 수 있어 회사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며 “전자도서관의 경우 그룹 임직원은 물론 협력사 직원에까지 개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책 권하는 CEO, 책 읽는 직장-신세계그룹]“돈 아끼지 마라”… 2014년 책값만 1억
입력 2014-06-09 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