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조서환 (6) 1980년대 초반 ‘마케팅’에 내 삶의 미래를 걸다

입력 2014-06-10 02:18
애경유지 재직 시절 자녀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조서환 대표.

참으로 힘들게 취업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지만 어려움은 계속됐다. 입사 동기들은 모두 생산·구매·회계 등 고유 업무가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맡은 일이 없었다. 그저 이 부서, 저 부서의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거나 외국 손님을 공항에서 맞이하는 일이 전부였다.

픽업맨 생활을 계속하니 팔이 너무도 피곤했다. 한 손으로 피켓을 드는 건 무척 힘들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내가 심부름센터 직원인가. 이 짓 하려고 영문과 나왔나.’ 일에 회의를 느끼자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생각을 바꿔라. 이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운동하는 셈 치자고 생각을 바꿨다. 그러자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저들 때문에 내가 고생이다’라며 외국 손님들이 건네는 명함을 받는 족족 찢어 버리던 내 눈에 ‘마케팅’이란 단어가 들어왔다. 이들의 명함에는 하나같이 이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때가 1980년대 초반으로 우리나라엔 마케팅이란 용어조차 잘 쓰지 않을 때였다. 알고 보니 이들 모두가 마케팅 전문가가 아닌가. 생소한 이 단어를 보자 동물적 감각으로 느낌이 왔다. ‘여기에 내 미래가 걸려 있다.’ 이것이 내가 추후 마케팅 전문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이 어디 있나. 일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하찮을 뿐이다.

생각이 바뀌었어도 길이 저절로 순탄하게 열리진 않았다. 담당 과장은 내가 공항이나 호텔로 나돌아 다닌다며 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게 내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인사고과 때마다 동기들은 A나 B를 받는데, 나만 항상 C나 D를 받았다. 매번 이런 평가를 받으니 호봉도 동기의 절반 정도고 봉급도 크게 차이가 났다. 진급에서도 번번이 누락됐다. 나는 C나 D를 맞을 정도로 업무태도가 형편없거나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장은 내 약점을 이용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낮은 평점을 받아야 하는데 그럴 바엔 최하점을 줘도 못 나갈 내게 준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낮은 인사고과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D를 줘도 다른 회사로 못 갈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낮은 고과를 준 건 정말이지 억울했다. 자식이 둘이나 되는 손 하나 없는 놈이 어디를 가겠나 싶어 D를 몰아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야비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건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나는 그 과장을 반드시 굴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가족에 대한 강한 책임감도 이유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나를 이 세상 최고라고 여기는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했다. 나를 향한 아내와 아이들의 믿음은 나를 강인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나도 벌떡 일어나서 “야, 이 자식아, 너 같은 저질하곤 일 못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래도 ‘언젠가는 내 밑에 들어올 것이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오기가 발동했고, 더 열심히 일했다. 그러자 내가 대리로 진급할 때 과장은 공장으로 발령이 났고, 내가 과장으로 부장 업무를 수행할 때 그 과장은 고참 차장으로 과장직을 맡았다. 만일 무너지는 자존심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면 지금 내 모습은 어떻게 되었을까. 진정성을 가지고 진실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소중한 계기였다.

이 땅의 수많은 후배 직장인들에게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진정한 자존심이란 무엇일까. 책임감을 갖고, 악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무조건 분에 못 이겨 때려치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극복 방안을 세우고 이에 따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자 성공의 지름길이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