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대형마트에는 수많은 공산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경쟁하듯 물건을 사곤 합니다. 하지만 풍요함의 한편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환경오염과 파괴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풍족함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고 훼손하는 상태를 두고 ‘피조물의 탄식(롬 8:22)’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자연의 파괴로 피조물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상태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때리면 맞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면 더러워지고 더 많이 버리면 더 많이 더러워집니다. 꽃은 꺾으면 꺾입니다. 자연은 한없이 약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세상의 작은 것들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지극히 작은 것들 중의 하나라고 여긴다면 이 말씀에 의지하여 자연을 귀하고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자연이 내 형제인가. 자연이 사람도 아닌데 뭘 잘해 주고 말 것이 있는가”라는 반문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창 1:31)”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무지개 언약은 사람뿐만 아니라 ‘너희(사람)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창 9:12). 바로 그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3:16). 자연은 우리가 섬길 지극히 작은 자이고 우리가 새로 찾은 ‘또 하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우리 자신의 왕국, 우리 자신의 해방, 우리 자신의 독립’이라는 좁은 관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좁은 관심을 넘어서 더 넓은 세계에 눈을 돌리라고 예수님은 우리를 채근하십니다. 그 떠미시는 손길에 밀려 “누가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비로소 우리는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자연도 우리의 이웃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눅 10:25∼37).
자연의 하나하나는 작고도 약합니다. 아니, 자연은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어서 우리보다 훨씬 더 크지만 우리가 작다고 여겨 함부로 대할 뿐입니다. 그런데 자연이 아직도 작게 여겨진다면 오히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늘로 닿게 하여 위에서 내려다보고 ‘낮게’ 볼 것이 아닙니다(창 11:6).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이(요 1:14)’ 존재의 사다리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오히려 가장 작은 것을 ‘낫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빌 2:3).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눅 12:15)’는 예수님의 말씀에 한 발 더 나아가 생명의 풍성함(요 10:10)을 조금 더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우리 이웃인 자연을 아끼고 돌보며 주께서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안홍철 목사(기독교환경운동 연대 사무총장)
[오늘의 설교] 가장 작은 우리의 이웃
입력 2014-06-09 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