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기] 無寃錄

입력 2014-06-09 02:11
정조 9년(1785년) 4월 20일. 황해도 평산의 양반집 며느리 박조이가 목 맨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건을 조사한 관리들은 자살로 결론 내린다. 박조이의 오빠는 시집간 지 얼마 안 된 누이의 죽음을 미심쩍게 여긴다. 그는 한양으로 올라가 억울하다고 상소한다. 정조는 이곤수를 암행어사로 파견한다.

이곤수는 영특한 자였다. 증언이나 증거가 부족했지만 세밀한 부검과 끈질긴 수사 끝에 박조이가 피살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곤수가 정조에게 보고한 사건의 전말은 충격적이었다. 박조이는 시어머니 최씨와 남편의 사촌동생인 조광진이 교간(交奸·간통)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행각이 드러날까 두려워한 두 사람에게 살해당했다. 정조는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은 관리들의 관직을 박탈하며 박조이와 유족의 원통함을 풀어주었다. 정조의 애민(愛民) 정신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정약용이 흠흠심서에서 조선 최악의 패륜사건으로 꼽은 박조이 사건이 해결된 데에는 무원록의 역할이 컸다. 원통함이 없게 한다는 뜻의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왕여가 1308년 펴낸 법의학 지침서다. 우리 기록에는 조선 세종 때부터 등장한다. 세종은 1430년 법관시험에 무원록을 포함시켰다. 1440년에는 최치운 등에게 주해를 달도록 해 신주무원록을 간행했다. 정조는 1792년 책의 중국식 용어를 우리 실정에 맞게 바꾸고 한글번역본을 추가해 중수무원록을 펴냈다.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책에는 빈틈이 있다. 두 사람의 피를 한 그릇에 넣고 피가 엉기면 같은 핏줄이라고 믿기도 했다. 외서(外書)인데다 허점이 있었지만 조선은 500년 이상 법집행에 무원록을 엄격히 적용했다. 고을 수령은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의혹이 풀릴 때까지 시신을 들여다봤다. 여섯 번까지 검시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원록은 20세기 일제 강점기 직전까지 조선의 법의학서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이 법의학을 중시한 이유는 간단했다. 왕들은 원통하게 죽는 백성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숙종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 ‘송사(訟事)에 억울하게 지는 일보다 원통한 일이 없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는 일은 더욱 원통하다. 후세에 옥사를 살피는 관원은 백성들로 하여금 원통한 경우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월호가 침몰한 지 54일이 지났다. 희생자·유가족의 원통함은 여전하다. 수백명의 승객에게 “그대로 있으라”고 지시하고 달아난 선장 등 주요 승무원 15명이 1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첫 재판을 받는다. 세월호 희생자의 원통함이 조금이라도 풀리길 소망한다.

김상기 차장 kitting@kmib.co.kr